Friday, November 15, 2013

[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5 1-11
2013 11 15일 새벽 설교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죽은 사람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이 죽게 된 이유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 째 부류는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입니다. 집사 스데반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그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다가 돌에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두번째 종류는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불순종하여 심판으로 죽게된 경우입니다. 세번째 종류는 졸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20장에 유두고라는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졸다가 떨어져 죽었던 것을 바울이 기도해서 다시 살렸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세가지 유형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된다면 어떤 종류를 원하시겠어요? ‘솔직히 편하게 살다가 그냥 조용히 평안히 죽었으면 좋겠습니다하는 마음이 저는 아직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세가지 종류의 죽음 모두는 사실 안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들입니다. 말씀들으러 왔다가 졸아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는 하나님 은혜로 다시 살아났으니까 됐다고 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왜 더 복을 받아야지 매맞고 핍박받고 죽는다는 말입니까?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살인이나 도적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바치다가 무언가 잘못이 생겨서 죽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죽음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의 첫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범상하게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내용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참 설명하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든 사건입니다. ‘그들의 허망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고민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1절 말씀에 보니까, 아나니아가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왜 소유를 팔았을까요? 앞절에 보면 바나바가 그의 소유를 팔아서 제자들의 발앞에 내려놓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권을 다 내려놓고 조금도 자기 것이라 하는 것이 없이서로 통용하며 서로를 돌보며 살았다고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렇게 주님 앞에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불어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들이 함께 결심하여 가진 것을 모두 다 내다 팔았습니다.

그들이 설령 판 모든 것을 드리는데 까지 못했다하더라도, 그 소유를 다 내다 팔았다는 것만도 사실 굉장한 결단을 요구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다 바칠 것을 요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 바나바처럼 스스로 자원해서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소유권을 내려놓는 다는 것은 믿음의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큰 결단에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것을 해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것은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숨겨진 욕심이 없는 선한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결단하고 실행하기 원했던 그 헌신에 실패하고 헌신하기 이전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왜 그들은 귀한 헌신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도중 탈락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속인 죄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스스로 결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큰 믿음에는 큰 댓가가 따른 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큰 믿음은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연단으로 지어지는 오랜 시간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첫번째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결단하기 이전에 주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기 이전에, (그것이 아주 당연히 주님을 위한 것이라 여겨질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는지, 주님이 나에게 그 결단을 하기를 요구하시는지, 그 음성을 듣기 전에 스스로 드릴 것과 결단할 것을 나 스스로 정하는 것은,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위해서 하는 결단이지 하나님을 위한 결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복종하는 기계나 노예로 보지 않으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영화롭게 하길 원하십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모습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한번에 다 이루고자 리스트를 적어서 매일 머리를 싸매고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삶이 아니라 율법에 매여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말씀해주시는 것들을 듣고 순종해서 고쳐나가는 삶입니다. 내가 한계단 올라서면 또 한계단을 올라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결단의 삶입니다.

가끔 저에게 와서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까?”그런 질문에 저는 항상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형제님에게 술을 먹지 말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나요?” 비슷한 질문인 듯 보이겠지만, 전자는 율법에 대한 질문이요, 후자는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원하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 듣고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3단계의 제자훈련반이 있습니다. 양육반, 제자반, 그 다음이 군사반입니다. 양육반에 이제 막 들어와서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들에게 요구되는 영성의 단계가 있고, 군사반 마치신 분들에게 요구되는 사역과 헌신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단해 나가는 과정이 성장의 과정입니다. 성장한 만큼 결단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실패했을까요?
5장의 시작 바로 이전에 나온 구절에 보면, 바나바는 레위족으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이미 초대 교회 안에서 훈련받고 성장하여서 얼마나 사람들을 잘 섬겼는지 그의 이름을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비로소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경이 이름외에 다른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교회안에서 어떤 과정과 믿음의 훈련을 거쳤는지 우리는 알 수 가 없습니다. 아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훈련과 성장의 단계를 그냥 뛰어넘어 (skip) 큰 결단과 큰 헌신을 하면 성숙한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쉬운 예로, 내가 꾸준히 기도 말씀 가운데 양육받고 훈련 받지 않았는데 헌금한번 크게 드린다고 내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갑자기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평소에 믿음의 훈련 가운데 내 자신을 드리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큰 봉사직책을 맡아 한번 한다고 해서 신앙 선배들의 반열에 저절로 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 비슷한 실수를 많이 했었습니다. 대학에 가니까 믿음이 좋은 선배들이 어찌나 많은지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모습 하나하나가 영성의 고수들이었습니다. 대학생활 몇 년동안 말씀을 암송하고, 성품을 훈련하고,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완전 베테랑이 된 선배들을 늘 동경하면서도, 그들이 매일 하고 있는 믿음의 훈련들을 저는 부지런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훈련없이 시간이 주는 그 성숙의 열매 없이 그저 믿음으로 신앙으로 존경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시작하니까 제 안에 나타나는 모습들은 잘못된 동기로 헌신하면서 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그들은 자신의 훈련받지 못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늘 자신보다 더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인정받고 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과 같은 훌륭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요, 결국엔 믿음의 파산으로 이르는 위험한 지름길입니다. 좋은 믿음은 끊임없는 겸손 가운데서 밥이 뜸이 들듯이 오랜 시간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훈련과 성장을 통해 이뤄져야 건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을 집에 비유하시면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대조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내 믿음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고 반석처럼 단단한 기초를 세워야 하는 것이지 조급하게 몇 층씩 건너 뛰다 보면 부실 공사가 되어버립니다.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지도가 높고 대단해 보이는 교회나 집회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속한 그 곳 예배의 수준이 자신의 믿음의 수준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유명한 목사님의 좋은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그 훌륭한 말씀을 듣고 있는 나도 수준있는 기독교인이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개척교회 섬길 때는 기도생활도 잘 안하던 교인들이 대형교회에 가서 뜨겁게 예배드리는 주위 회중을 보면서 내 믿음이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내 믿음과 성숙함은 하나님이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벌거벗은 듯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무리 바나바의 믿음을 가졌다고 나를 속이고 바나바같은 헌신을 하고자 할지라도, 주님앞에 나의 모습은 여전히 아나니아요 삽비라 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스스로 믿음이 있다’ ‘성숙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검증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인스턴트로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장에는 큰 댓가와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오늘 드리는 말씀의 두번 째 요점입니다. 많은 사람이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을 원하지만 그 믿음이 요구하는 댓가와 헌신은 부인하고자 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믿음이 우리의 훈장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무슨 신앙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해서 더 존경받고자 하는 마음은 버려져야 할 것입니다. 더 성숙하면 성숙할 수록 내게 주어진 십자가도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정상적인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제자로서 군사로서 서 갈 수록 하나님은 우리가 더 깊은 헤아림과 준비됨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높은 수준의 성품과 훈련됨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내가 막 예수님 영접했을 때는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내가 성장하면서 내 마음 속에 걸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것들이 점점 늘어져가고 깊어져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똑같은 결단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로서 이제 복음의 씨앗을 열방에 전해야 할 첫 메신저들이 되어야할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엄격한, (또는 혹독한), 훈련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옥한음 목사님이 그분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토록 가혹한 죽음을 당해야했던 것이, 99%가 아니라 100%의 믿음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대교회를 향한 요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옥한음 저, 교회는 이긴다, 국제 제자훈련원 출판, 2012.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응답해야합니다. 나의 믿음의 분량은 어디까지 와있는가? 내가 제자훈련을 마쳤다고 해서, 내가 성경을 10독했다고 해서, 내가 생각하는 그 믿음의 위치에 내가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어선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이고 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투명하게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몇 단계까지 왔나 계산하고 나를 평가하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 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기울여 청종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내가 어떤 위대한 믿음을 인스턴트로 모양만 취하려 했다면, 는 철저한 회개와 기본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하든지 나를 어떻게 인정해주는지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실하게 바라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결단, 내 앞에 놓여진 한 계단을 믿음으로 단단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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