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 2013

[설교]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
고린도전서 13:1-13
2013 12 2일 새벽 설교

오늘 본문인 고린도 전서 13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장이어서 사실 제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 이외에 무얼 더 보태서 설교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들게하는 그런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상하고 읽을 때마다 그 말씀에서 와닿는 깊은 울림이 있는 그런 본문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Copyright @ 글빛 박혁남 (출처: http://blog.daum.net/kw2996/155) 
본문 흐름상의 전체적인 문맥을 먼저 살펴본다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편지에서 지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중입니다. 앞 장 1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몸에 비유하면서 지체는 많으나 교회는 한 몸임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전도하는 사람도 있고 방언하는 사람도 있고 통역하는 사람도 있고 각양 다른 은사와 다른 지체가 있지만 그 지체가 한 몸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 쓸 데가 없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장 마지막 절에 바울은 이렇게 도전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그러면서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여기에서 두 가지 단어가 중요합니다. 첫번째는 은사이고 두번 째는 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을 때 그 큰 은사는 14 1절에 나오는 신령한 것들(Gifts of the Spirit)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 즉 성령 하나님을 알고, 성령과의 친밀함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더욱 큰 선물들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기 위한 가장 좋은, excellent한 방법, 즉 길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12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교만해지고 갈라진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해져있는, 그래서 더욱 직제화되고 권력화 되버린 은사들을 뛰어넘어서 (사도, 교사, 선지자, 등등), 성령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도전 합니다.
그 큰 은사가 무엇인지, 바울은 12장에서 언급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14장에서 그것 중의 하나가 예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2, 13, 14장 사이의 연결 흐름의 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여러가지 은사들 안에서 예언과 신령한 은사들과 사랑에 대해 좋은 정리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언이란 무엇인가요? 은사주의적 전통에서는 예언이 사람의 마음, 미래,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직통계시를 통해서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성경 안에서 바울이 쓰고 있는 예언의 의미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또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예언과 그 의미가 비슷하다고 봅니다. 구약성경과 바울의 말씀 속에서 예언이라는 것은 해석이라는 말과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말씀 속에서 지금 세상과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석(interpretation)”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분별하는 해석적 능력이 곧 예언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내가 속한 공동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개인적인 영적인 판단만으로 옳다고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해석함을 통해서 지금 내가 속한 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파악하고 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목회자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속한 목장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사역부 또는 내가 품은 선교와 중보기도의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는 힘이 말씀의 해석을 통해 성령안에서 이뤄져야 공동체가 살아있는 몸이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것들을 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14 1절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이라는 말을 너무 좁게 받아들이면 잘못된 예언들이 난무하여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기 위한 해석적 능력으로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정작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이 이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오늘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예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이라고 바울은 말하였지요? 사랑이라고 합니다. 참 예상치 못한 대답입니다. 금식이나 기도라든가, 영적 파워라든가, 뭔가 뜨거운 노력이 언급될 것 같은데, 바울은 가장 좋은 excellent way가 사랑이라고 합니다.

수 년동안 많은 실패와 연습을 거듭하면서 교회를 섬기다 보니까 저는 이제서야 바울이 말씀하는 사랑이 왜 가장 좋은 길인지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제 결론은, 사랑이 말씀해석의 열쇠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예언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전제조건은 공동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였을 때 그것이 낳는 상처와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말과 좋은 자료를 가지고 설교를 해도 그 말씀이 허공에 맴돌게 됩니다. 물론 말씀 자체로도 능력이 있기에 그것에도 은혜받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진정한 능력은 그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가지고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그 사랑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였을 때 변화가 일어나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단순한 한마디 말씀이라도,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대!”사랑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과 아닌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설교자의 덕목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말씀을 묵상하고 개인적인 적용도 하지만, 또한 공동체를 섬기며 중보하고 목장에 영혼들을 돌볼 때에 우리가 말씀안에 깨어 있어야 하지 않아요? 그 말씀 안에 들어갈 때 그 영혼들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말씀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내 안에 주시는 말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롭게 섬김으로 행동으로 전하면 그것이 신령한 예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인터넷 설교와 신앙서적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미디어 홍수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피상적인 미디어를 통해 내 신앙이 자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메세지들이 대중매체 (Mass Media), 즉 일 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메세지 이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사람은 있는데 듣는 사람들은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 메세지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과 상황과 마음속의 아픔을 깊이 알기 어렵습니다. 결국에는 공동체 안에서 어렵고 힘들더라도 부히면서 서로 용납하고 오픈하고 알아가면서 듣고 은혜받는 말씀이 우리를 자라게 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없는 은사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사랑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더 깊은 영성으로 한단계 나아가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똑같은 사랑으로 그 분의 양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마지막 부탁이 그 분의 양들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훈련받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이 사랑의 계단을 밟고 올라섰는가 묻고 싶습니다. 나의 영적 은사와 사역이 사랑에 기반한 것인가? 조건없이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하고 있는가?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 몸을 불사르게내어줄 것처럼 수고하고 헌신하면서도 사랑이 아닌, 사랑의 이름으로 가장한 자아실현이나 잘못된 동기로 그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님앞에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사랑을 우리 삶 속에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아가페라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 사랑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사랑이 믿음과 소망 보다 더 위대한 것인가?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결과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는 주체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은 내가 품고 이끌어나가는 것인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야만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신뢰하고 바라고 소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예 믿습니다!”고백하고 선택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주도권이 단 1%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노력이 불필요한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내게 부어지기 위해 우리는 의지적으로 사랑의 노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또 하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내가 다가가서 기도하고 사랑의 말을 전할 때 내 마음 속에 그 사랑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순전한 기독교>의 작가, CS루이스도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랑의 행동은 진정한 사랑이 생기기 위한 준비 단계와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루이스는 2차대전 당시 독일 군인들이 유태인을 무자비하게 죽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유태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진정한 증오가 미움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난 것처럼, 사랑도 사랑의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의 촛불에 하나님께서 불꽃을 피워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CS 루이스 저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이끌어내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노력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은사이자 열매이기도 합니다. 은사는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 은혜의 선물이지요. 동시에 사랑은 열매입니다. 내가 땀흘림과 수고를 통해 일구었을 때 피어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만 내 속에 생겨날 수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희생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를 대신하지 못함을 깨닫고 깨어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고 내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품고 다가가려는 한 순간 한 순간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신령한 것들을 좇아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랑만큼 중요한 영적 성장의 과정은 없습니다. 오늘 그 사랑의 기반으로 돌아가 우리의 영성을 점검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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