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 2013

삭개오의 고민

삭개오의 고민
누가복음 19:1-10
2013-11-01 새벽 설교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자라는 아이들이 정말 많이 듣게 되는 성경이야기들이 있는데, 구약 성경에서는 노아, 다윗과 골리앗, 솔로몬, 요나 같은 이야기들이 있고, 신약에서는 매번 성탄 연극의 주제가 되는 아기 예수님 이야기도 있지만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삭개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의 모습이 아마도 어린이들에게 더 와닿았기 때문일까요? 삭개오 이야기는 예수님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단연 몇 순위에 꼽히는 유명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마치 난장이 같이 키작은 삭개오가 사람들에 가려서 폴짝 폴짝 뛰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구경하는 모습이 상상만해도 우스꽝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인이 되어서 이 말씀을 읽으면 읽을 수록, 묵상가운데 이 삭개오라는 인물에게 많은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마음 속에 많은 못다한 이야기들이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에 보면, 그는 군중 앞에 시야가 가릴만큼 키가 작은 왜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는 작은 사람인데 사회적으로는 반대로 세리장에 부자라고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자기 민족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민족의죄인으로 낙인 찍힌 그가 이름은 순결이라는 뜻을 가진 삭개오라고 합니다. 모순되는 모습들이 복잡하게 그의 삶에 얽혀 있습니다. 작은 체구와 대조되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 그리고 순결이라는 이름과 대조되는 그의 얼룩진 명성은 삭개오라는 이 작은 개인 안에 어떤 복잡한 한스런 이야기들이 서려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성경에는 짧은 몇 마디로 그의 인물을 묘사하고 있지만, 삭개오가 지금 예수님 앞에 나아오기 전까지의 그의 인생 여정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 몇 줄 안되는 말씀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과 인생의 아픔들이 요약되어 있을까요? 저는 성경 묵상이 나이가 드시고 인생의 경험이 쌓여갈 수록 더욱 깊어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어릴적에는 단순하게 부자이고 죄인이었던 난장이 삭개오로만 여겼는데, 내가 인생 속에서 겪어가는 경험들과 아픔들이 쌓이면 쌓일 수록 그 인물에 대해 더 깊이 바라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인물들 속에서도, 단순한 인생은 없다는 깨달음을 갖고 성경의 인물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니까, 그 인물들을 통해서 내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많은 인생의 단상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삭개오를 바라보면서 그의 인생이 어떠했을까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부모가 순결한 삶을 살라는 숭고한 뜻과 바램을 가지고 그를 낳아 길렀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그렇듯이, 그도 꿈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벽이라는 것이 그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로마제국의 식민지로서 살아가면서,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 그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왜소했던 그의 외모는 그에게 더욱 큰 거절감과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경유에서였는지, 그는 자기 민족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지탄받는 세리가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로마의 정치적인 힘을 뒤에 업고 세금을 거둬들이며 부를 축적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식민지배하의 유대인으로서, 또 왜소한 힘없는 개인으로서 경험했던 거절감과 상처를 남의 권력을 이용해 부를 쌓아서 해결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마음 속에 갈등과 상처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축적한 부나 사회적인 힘도 지위도 그의 인생을 의미있게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삭개오의 인생에 있어서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열심히 노력하며 이뤄낸 것은 재물과 자그마한 권력입니다. 그런데 그 이뤄낸 열매가 무엇으로 인한 열매인지가 중요합니다. 그 열매는 삭개오가 자신에게 "없는 것 (lack)"에 집중해서 그 없는 것을 채우고자 이뤄낸 열매들이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풍성하고 (fulfilled) 의미 있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내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 때 그 삶이 주님 앞에 내 자신 앞에 후회없는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들이 나의 본 소명이 무엇인가 보다는 내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그 없는 것을 갖기 위해 인생을 일궈나갑니다. 돈이 없어서 돈을 벌기 위한 기준으로 직장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경제적 문화적 여유를 나도 갖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인생을 계속해서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달려가다 보니까 채워도 채워도 마음에 충족감이 없습니다. 남에게 있는데 내게는 없는 것이 나에게 큰 컴플렉스가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을 움직이는 주요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삭개오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그 마음속에 박탈감을 가지고 채워나가려고 했던 모든 것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이 모순 덩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기나긴 인생여정을 지내고 나니까 처음에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과는 정 딴 모습의 엉터리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사는 삶은 욕망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욕망의 삶이 아니라 소명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소명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인생이라는 장 (stage)으로 나를 부르신 (called) 하나님을 주목하여 사는 삶입니다. 같은 택시 운전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운전사는 돈을 벌기 위해 운전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없는 재물이라는 요소를 채우기 위해 그의 인생을 선택했습니다. 또 다른 한사람은 택시 운전이라는 자리 (stage)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함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소명을 가지고 그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두번째 사람도 돈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기준이 자신이 없는 것에 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아야 할 소명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두 사람이 운전하는 택시가 나란이 주차되어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어떤 택시를 타고 싶으시겠어요?

삭개오는 중년의 기로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소명이 빠진 삶에는 늘 실존적 고뇌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러 나온 동기 속에는 자신의 모순된 삶을 누군가 해결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성경번역이 개정되면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나무가 뽕나무인가, 무화과 나무인가, 한국에 있는 종자인가 아닌가이스라엘에 있는 관광코스에 삭개오의 나무가 진짜 삭개오가 올랐던 나무인가 아닌가. 여러가지 재미있는 논쟁이 오갔습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돌무화과나무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말 그대로 열매가 작고 돌처럼 단단해서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길가에 그늘을 제공해주는 가로수 같은 나무로 나중에 목재로 잘라서 쓸 수는 있어도 열매를 잘 맺는 나무는 아닙니다. 한국 거리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나무가 삭개오와 참 닮았습니다. 수십년 세월 동안 가지가 넓고 높게 뻗어 올라갔지만 그 가지에 열매는 먹기조차 힘든 그런 나무가 삭개오의 열심히 노력했지만 무의미한 그의 삶의 모습과 교차됩니다. 그 뽕나무 가지에 붙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삭개오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의 나무가지에 올라 있으신가요? 시냇가에 심은 열매맺는 그런 나무인가요 아니면 삭개오의 돌무화과나무인가요?


삭개오가 그렇게 나무에 올랐지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시선이 쏠려서 그의 아픔이나 상처따위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이 그 길을 지나가시면서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세리장으로서가 아니라 부자로서가 아니라 그의 본래 이름, 순결한 삶을 살도록 부모가 지어주신 그 이름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면서 예수님이 삭개오를 알아보시고, 맞으시고, 그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의 아픔이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아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이 치유의 핵심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이전까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채우려고 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없는 그것이 건장한 체구로 상징되는 힘과 재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는 보다 근원적인 부분을 파고 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상처와 아픔이 힘과 재물이 없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더 근원적인 그의 부족은 누군가의 인정 (recognition)이었던 것입니다.
왜 힘과 재물이 중요하지요? 사람들이 알아주니까 얻고 싶은 것입니다. 잘먹고 잘 사는 것은 어느 정도만 있어도 됩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더욱 힘과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마음속에 사람들의 인정(social recognition)에 대한 욕망이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그분의 친구요 제자로 인정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정으로 인해 내 자신이 안정(secure)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인정을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인정을 원하고 학생은 교수의 인정을 원합니다. 사회적인 인정을 위해 지금도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 끊임없는 인정을 향한 뜀박질을 멈추고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내 마음의 집에 진정 들어와 내주하시는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스 기니스 저, 소명, IVP 출판사, 2000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에는 소명의 첫 단계가 소명을 주시는 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소명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일을 향해 사명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소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인정하시는 참되신 사랑의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그 깊은 모순의 삶 속에서 허덕이다가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 변화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요 그분의 소명을 따라 살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인정하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정은 내가 더 노력해서 애를 써서 얻어내야 (earn)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족한 나를 인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인정, 은혜의 인치심을 받아야 진정한 소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 내게 부족한 것, 사람들의 인정, 내가 인정 못받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것들 속에서 언제까지 허둥대며 살겠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속히 내려오라.”어서 빨리 그 곳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의 은혜의 인정을 받고 그 속에서 소명을 발견해야합니다. 10절 말씀대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무소명의 삶 속에서 소명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노력이 아닌 은혜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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