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3, 2013

[설교] 하나님의 일꾼들로 살아가기

하나님의 일꾼들로 살아가기
고린도후서 6:1-10
201312 4일 새벽 설교

오늘 본문 속에서 바울은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역경과 연단의 세월을 회고하면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살아온 삶의 목적은 단 이 한가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님의 복음을 받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바울은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이 직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제대로 받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바울이 치루어야 했던 수많은 댓가와 고난의 여정이 오늘 그의 고백 가운데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그 직분이 비방받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무엇을 하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기 위해 자신을 연단하고 절제하고 훈련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순간에서도 이 직분을 놓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직분이 사역할 때만 직분이고 집에 가면 직분이 아닌 그런 것이라면 참된 직분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직분은 타이틀이나 직위나 포지션이 아니라 소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사무실 전등처럼 주님을 섬길 때가 있습니다. 제가 밤에 설교 준비하거나 교회 일을 하러 사무실에 들어가면 불을 켭니다. 그럼 전등에 불이 들어오지요. 그리고 나갈 때 퇴근할 때 불을 끄고 나갑니다. 그런 전등같은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오면 켜졌다가 교회 나갈 땐 꺼지는 그런 신앙과 소명은 나만 비방받데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시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3절 말씀대로 바울은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하기 위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일입니다. 내가 24시간동안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집안일을 할 때 이든지, 밖에서 일을 할 때이든지,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이든지, 밖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이든지, 나를 하나님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았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실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르고 저기서 다른 그런 삶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온전히 전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가운데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그 은혜가 전달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삶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4절부터 시작되는 고백을 통해 바울은 그 길이 어렵고 힘든 길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 그의 삶이 어찌나 고되었는지 갖은 핍박과 고난을 다 받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고자 하는 용감한 결단을 하고자 하는 우리 앞에 성경 말씀은 한치의 속임도 없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길에 분명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못함과 먹지못함이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새벽에 나오신 여러분은 적어도 이중에 두가지는 이미 감당하고 이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아침 일찍 잠을 포기하고 배고픔을 참고 이 자리에 먼저 나오기를 결정하셨으니 자지못함과 먹지못함을 벌써 감당하신 셈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겠다고 자천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지개빛 삶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 길은 험하고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은 지적합니다. 바울은 그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힘들고 지치면 불평하기 쉽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종으로 섬기기로 이렇게 결단까지 하였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요?”불평가운데 쓴뿌리가 생겨서 나와 주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가운데서 깨어서 자신을 지킬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 째로 바울이 지킨 것은 깨끗함입니다. 깨끗함은 순결함이요 때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힘들고 역경에 부딪힐 때 많은 사람들이 처음 가졌던 순수한 열정에서 벗어나서 쓴뿌리로 또는 불평하고 비판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깨끗함이라는 것은 순수한 동기와 타협되지 않은 마음의 일관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이 역경 속에서 지닌 것은 지식입니다. 영어성경에는 Understanding 즉 이해함이라고 나와있습니다. 통찰력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히는 상황과 어려움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가기 보다는 그 어려움의 시간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해주시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세번 째로 바울이 고난 가운데 지킨 것은 오래참음과 자비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들을 하면서 힘든 시간이 찾아왔을 때 가장 조심해야할 것 중의 하나가 조급함입니다. 조급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기 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급한 마음에 기도하기 보다는 전화기를 들고 사람들의 반응을 찾아 나서게 되고요.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인간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또한 조급함에 빠졌을 때 우리 마음에 여유가 없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연약함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힘들고 여유가 없으니까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안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들을 우리가 해나갈 때 늘 우리에게는 돌보고 함께 할 동역자들이 있지요. 내가 조급하고 성급해지면 그들을 향한 자비함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역은 오래가지 못하게 되고 상처와 문제를 낳게 됩니다. 힘들고 역경이 찾아 올수록 오래참고 자비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지도록 기도해야합니다.

네번째로 역경 가운데 바울이 놓지 않은 것은 성령의 감화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그 모든 환란과 궁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의 감화하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감화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자주 성령의 감화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매일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의 감화하심, 그 은혜주시고 채워주시고, 감동케 하시는 그 성령님의 터치하심이 내 삶에 끊이지 않고 계속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로 매일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가 필요하고 그 관계는 사랑으로만 맺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조건이 없는 어떤 수단으로서가 아닌 순전한 사랑입니다. 지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묵상한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크게 복음을 외친다 할지라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거짓이 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왜 사회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불신하게 되어버렸나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악하고 사단의 꾀이에 빠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당연히 사회에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기를 기대하는데 갈수록 사회에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반대로 교회는 쇼핑몰처럼 커져만 가는 것이 교회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으로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때로는 세상의 비판에도 귀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바울도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하면서 그가 그 어렵고 힘든 역경을 다 지나가야 했던 것이 본인에게 주신 직분이 아무에게도 비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 역경 가운데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의의 무기들을 지녔다고 이야기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고, 의의 무기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도 말씀이 곧 성령의 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 자신을 시험과 낙담과 불평 속에서 지켜내고 하나님의 온전한 일꾼으로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을 지키고 역경 가운데 성령안에 거할 때 바울의 삶이 어떠했다고 고백하고 있나요? 그가 영광을 받든, 욕을 먹든; 악하다고 비방받든지 아름다운 이름으로 칭송받든지; 속이는 자라고 오해받으나 참된 사람으로, 이름도 없는 무명처럼 살았지만 주님앞에 유명한 자로, 죽은 자 같이 무시받고 천대받고 궁핍하고 핍박받았지만 살아서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면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자족하며 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상상해보았습니다. 바울의 모든 인생의 여정을 직접 보고 들은 그의 동역자들은 이 바울의 고백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자요 죽은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바울이 그만큼 무시받고 천대받는 삶을 스스로 택하여 주님의 일꾼으로 살았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그의 상황과 반대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족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유명하지 않고, 낮은 취급을 당하고, 근심하게 되고, 가난하게 된 것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였던 마음이 있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우리의 명예나 안락한 삶이나 부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주님을 위해 어렵고 궁핍한 환경에 처했을 때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는 권리조차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그것이 필요한가?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방해되는 일이 없기 위하여 그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주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바울의 삶의 고백 앞에서 다시 한번 겸손하여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원망이 아니라 불평이 아니라 깨끗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없는 사랑과 감사로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주에 인터넷에서 재미난 글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주님께 불평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 할만큼 했어요.”그랬더니 그 기도를 들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도 집사님에게 할만큼 했다고 하시면 어쩌실 거에요?”

주님은 우리를 향한 수고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고통 가운데 있을 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Monday, December 2, 2013

[설교]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
고린도전서 13:1-13
2013 12 2일 새벽 설교

오늘 본문인 고린도 전서 13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장이어서 사실 제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 이외에 무얼 더 보태서 설교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들게하는 그런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상하고 읽을 때마다 그 말씀에서 와닿는 깊은 울림이 있는 그런 본문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Copyright @ 글빛 박혁남 (출처: http://blog.daum.net/kw2996/155) 
본문 흐름상의 전체적인 문맥을 먼저 살펴본다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편지에서 지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중입니다. 앞 장 1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몸에 비유하면서 지체는 많으나 교회는 한 몸임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전도하는 사람도 있고 방언하는 사람도 있고 통역하는 사람도 있고 각양 다른 은사와 다른 지체가 있지만 그 지체가 한 몸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 쓸 데가 없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장 마지막 절에 바울은 이렇게 도전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그러면서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여기에서 두 가지 단어가 중요합니다. 첫번째는 은사이고 두번 째는 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을 때 그 큰 은사는 14 1절에 나오는 신령한 것들(Gifts of the Spirit)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 즉 성령 하나님을 알고, 성령과의 친밀함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더욱 큰 선물들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기 위한 가장 좋은, excellent한 방법, 즉 길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12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교만해지고 갈라진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해져있는, 그래서 더욱 직제화되고 권력화 되버린 은사들을 뛰어넘어서 (사도, 교사, 선지자, 등등), 성령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도전 합니다.
그 큰 은사가 무엇인지, 바울은 12장에서 언급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14장에서 그것 중의 하나가 예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2, 13, 14장 사이의 연결 흐름의 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여러가지 은사들 안에서 예언과 신령한 은사들과 사랑에 대해 좋은 정리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언이란 무엇인가요? 은사주의적 전통에서는 예언이 사람의 마음, 미래,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직통계시를 통해서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성경 안에서 바울이 쓰고 있는 예언의 의미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또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예언과 그 의미가 비슷하다고 봅니다. 구약성경과 바울의 말씀 속에서 예언이라는 것은 해석이라는 말과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말씀 속에서 지금 세상과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해석(interpretation)”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분별하는 해석적 능력이 곧 예언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내가 속한 공동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개인적인 영적인 판단만으로 옳다고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해석함을 통해서 지금 내가 속한 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파악하고 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목회자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속한 목장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사역부 또는 내가 품은 선교와 중보기도의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는 힘이 말씀의 해석을 통해 성령안에서 이뤄져야 공동체가 살아있는 몸이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것들을 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14 1절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이라는 말을 너무 좁게 받아들이면 잘못된 예언들이 난무하여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기 위한 해석적 능력으로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정작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이 이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오늘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예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이라고 바울은 말하였지요? 사랑이라고 합니다. 참 예상치 못한 대답입니다. 금식이나 기도라든가, 영적 파워라든가, 뭔가 뜨거운 노력이 언급될 것 같은데, 바울은 가장 좋은 excellent way가 사랑이라고 합니다.

수 년동안 많은 실패와 연습을 거듭하면서 교회를 섬기다 보니까 저는 이제서야 바울이 말씀하는 사랑이 왜 가장 좋은 길인지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제 결론은, 사랑이 말씀해석의 열쇠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예언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전제조건은 공동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였을 때 그것이 낳는 상처와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말과 좋은 자료를 가지고 설교를 해도 그 말씀이 허공에 맴돌게 됩니다. 물론 말씀 자체로도 능력이 있기에 그것에도 은혜받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진정한 능력은 그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가지고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그 사랑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였을 때 변화가 일어나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단순한 한마디 말씀이라도,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대!”사랑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과 아닌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설교자의 덕목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말씀을 묵상하고 개인적인 적용도 하지만, 또한 공동체를 섬기며 중보하고 목장에 영혼들을 돌볼 때에 우리가 말씀안에 깨어 있어야 하지 않아요? 그 말씀 안에 들어갈 때 그 영혼들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말씀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내 안에 주시는 말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롭게 섬김으로 행동으로 전하면 그것이 신령한 예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인터넷 설교와 신앙서적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미디어 홍수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피상적인 미디어를 통해 내 신앙이 자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메세지들이 대중매체 (Mass Media), 즉 일 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메세지 이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사람은 있는데 듣는 사람들은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 메세지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과 상황과 마음속의 아픔을 깊이 알기 어렵습니다. 결국에는 공동체 안에서 어렵고 힘들더라도 부히면서 서로 용납하고 오픈하고 알아가면서 듣고 은혜받는 말씀이 우리를 자라게 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없는 은사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사랑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더 깊은 영성으로 한단계 나아가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똑같은 사랑으로 그 분의 양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마지막 부탁이 그 분의 양들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훈련받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이 사랑의 계단을 밟고 올라섰는가 묻고 싶습니다. 나의 영적 은사와 사역이 사랑에 기반한 것인가? 조건없이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하고 있는가?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 몸을 불사르게내어줄 것처럼 수고하고 헌신하면서도 사랑이 아닌, 사랑의 이름으로 가장한 자아실현이나 잘못된 동기로 그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님앞에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사랑을 우리 삶 속에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아가페라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 사랑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사랑이 믿음과 소망 보다 더 위대한 것인가?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결과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는 주체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은 내가 품고 이끌어나가는 것인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야만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신뢰하고 바라고 소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예 믿습니다!”고백하고 선택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주도권이 단 1%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노력이 불필요한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내게 부어지기 위해 우리는 의지적으로 사랑의 노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또 하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내가 다가가서 기도하고 사랑의 말을 전할 때 내 마음 속에 그 사랑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순전한 기독교>의 작가, CS루이스도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랑의 행동은 진정한 사랑이 생기기 위한 준비 단계와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루이스는 2차대전 당시 독일 군인들이 유태인을 무자비하게 죽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유태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진정한 증오가 미움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난 것처럼, 사랑도 사랑의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의 촛불에 하나님께서 불꽃을 피워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CS 루이스 저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이끌어내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노력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은사이자 열매이기도 합니다. 은사는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 은혜의 선물이지요. 동시에 사랑은 열매입니다. 내가 땀흘림과 수고를 통해 일구었을 때 피어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만 내 속에 생겨날 수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희생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를 대신하지 못함을 깨닫고 깨어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고 내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품고 다가가려는 한 순간 한 순간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신령한 것들을 좇아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랑만큼 중요한 영적 성장의 과정은 없습니다. 오늘 그 사랑의 기반으로 돌아가 우리의 영성을 점검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Friday, November 15, 2013

[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5 1-11
2013 11 15일 새벽 설교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죽은 사람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이 죽게 된 이유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 째 부류는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입니다. 집사 스데반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그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다가 돌에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두번째 종류는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불순종하여 심판으로 죽게된 경우입니다. 세번째 종류는 졸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20장에 유두고라는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졸다가 떨어져 죽었던 것을 바울이 기도해서 다시 살렸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세가지 유형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된다면 어떤 종류를 원하시겠어요? ‘솔직히 편하게 살다가 그냥 조용히 평안히 죽었으면 좋겠습니다하는 마음이 저는 아직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세가지 종류의 죽음 모두는 사실 안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들입니다. 말씀들으러 왔다가 졸아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는 하나님 은혜로 다시 살아났으니까 됐다고 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왜 더 복을 받아야지 매맞고 핍박받고 죽는다는 말입니까?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살인이나 도적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바치다가 무언가 잘못이 생겨서 죽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죽음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의 첫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범상하게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내용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참 설명하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든 사건입니다. ‘그들의 허망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고민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1절 말씀에 보니까, 아나니아가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왜 소유를 팔았을까요? 앞절에 보면 바나바가 그의 소유를 팔아서 제자들의 발앞에 내려놓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권을 다 내려놓고 조금도 자기 것이라 하는 것이 없이서로 통용하며 서로를 돌보며 살았다고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렇게 주님 앞에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불어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들이 함께 결심하여 가진 것을 모두 다 내다 팔았습니다.

그들이 설령 판 모든 것을 드리는데 까지 못했다하더라도, 그 소유를 다 내다 팔았다는 것만도 사실 굉장한 결단을 요구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다 바칠 것을 요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 바나바처럼 스스로 자원해서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소유권을 내려놓는 다는 것은 믿음의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큰 결단에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것을 해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것은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숨겨진 욕심이 없는 선한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결단하고 실행하기 원했던 그 헌신에 실패하고 헌신하기 이전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왜 그들은 귀한 헌신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도중 탈락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속인 죄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스스로 결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큰 믿음에는 큰 댓가가 따른 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큰 믿음은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연단으로 지어지는 오랜 시간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첫번째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결단하기 이전에 주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기 이전에, (그것이 아주 당연히 주님을 위한 것이라 여겨질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는지, 주님이 나에게 그 결단을 하기를 요구하시는지, 그 음성을 듣기 전에 스스로 드릴 것과 결단할 것을 나 스스로 정하는 것은,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위해서 하는 결단이지 하나님을 위한 결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복종하는 기계나 노예로 보지 않으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영화롭게 하길 원하십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모습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한번에 다 이루고자 리스트를 적어서 매일 머리를 싸매고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삶이 아니라 율법에 매여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말씀해주시는 것들을 듣고 순종해서 고쳐나가는 삶입니다. 내가 한계단 올라서면 또 한계단을 올라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결단의 삶입니다.

가끔 저에게 와서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까?”그런 질문에 저는 항상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형제님에게 술을 먹지 말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나요?” 비슷한 질문인 듯 보이겠지만, 전자는 율법에 대한 질문이요, 후자는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원하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 듣고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3단계의 제자훈련반이 있습니다. 양육반, 제자반, 그 다음이 군사반입니다. 양육반에 이제 막 들어와서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들에게 요구되는 영성의 단계가 있고, 군사반 마치신 분들에게 요구되는 사역과 헌신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단해 나가는 과정이 성장의 과정입니다. 성장한 만큼 결단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실패했을까요?
5장의 시작 바로 이전에 나온 구절에 보면, 바나바는 레위족으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이미 초대 교회 안에서 훈련받고 성장하여서 얼마나 사람들을 잘 섬겼는지 그의 이름을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비로소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경이 이름외에 다른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교회안에서 어떤 과정과 믿음의 훈련을 거쳤는지 우리는 알 수 가 없습니다. 아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훈련과 성장의 단계를 그냥 뛰어넘어 (skip) 큰 결단과 큰 헌신을 하면 성숙한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쉬운 예로, 내가 꾸준히 기도 말씀 가운데 양육받고 훈련 받지 않았는데 헌금한번 크게 드린다고 내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갑자기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평소에 믿음의 훈련 가운데 내 자신을 드리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큰 봉사직책을 맡아 한번 한다고 해서 신앙 선배들의 반열에 저절로 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 비슷한 실수를 많이 했었습니다. 대학에 가니까 믿음이 좋은 선배들이 어찌나 많은지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모습 하나하나가 영성의 고수들이었습니다. 대학생활 몇 년동안 말씀을 암송하고, 성품을 훈련하고,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완전 베테랑이 된 선배들을 늘 동경하면서도, 그들이 매일 하고 있는 믿음의 훈련들을 저는 부지런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훈련없이 시간이 주는 그 성숙의 열매 없이 그저 믿음으로 신앙으로 존경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시작하니까 제 안에 나타나는 모습들은 잘못된 동기로 헌신하면서 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그들은 자신의 훈련받지 못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늘 자신보다 더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인정받고 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과 같은 훌륭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요, 결국엔 믿음의 파산으로 이르는 위험한 지름길입니다. 좋은 믿음은 끊임없는 겸손 가운데서 밥이 뜸이 들듯이 오랜 시간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훈련과 성장을 통해 이뤄져야 건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을 집에 비유하시면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대조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내 믿음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고 반석처럼 단단한 기초를 세워야 하는 것이지 조급하게 몇 층씩 건너 뛰다 보면 부실 공사가 되어버립니다.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지도가 높고 대단해 보이는 교회나 집회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속한 그 곳 예배의 수준이 자신의 믿음의 수준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유명한 목사님의 좋은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그 훌륭한 말씀을 듣고 있는 나도 수준있는 기독교인이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개척교회 섬길 때는 기도생활도 잘 안하던 교인들이 대형교회에 가서 뜨겁게 예배드리는 주위 회중을 보면서 내 믿음이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내 믿음과 성숙함은 하나님이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벌거벗은 듯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무리 바나바의 믿음을 가졌다고 나를 속이고 바나바같은 헌신을 하고자 할지라도, 주님앞에 나의 모습은 여전히 아나니아요 삽비라 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스스로 믿음이 있다’ ‘성숙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검증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인스턴트로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장에는 큰 댓가와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오늘 드리는 말씀의 두번 째 요점입니다. 많은 사람이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을 원하지만 그 믿음이 요구하는 댓가와 헌신은 부인하고자 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믿음이 우리의 훈장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무슨 신앙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해서 더 존경받고자 하는 마음은 버려져야 할 것입니다. 더 성숙하면 성숙할 수록 내게 주어진 십자가도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정상적인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제자로서 군사로서 서 갈 수록 하나님은 우리가 더 깊은 헤아림과 준비됨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높은 수준의 성품과 훈련됨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내가 막 예수님 영접했을 때는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내가 성장하면서 내 마음 속에 걸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것들이 점점 늘어져가고 깊어져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똑같은 결단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로서 이제 복음의 씨앗을 열방에 전해야 할 첫 메신저들이 되어야할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엄격한, (또는 혹독한), 훈련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옥한음 목사님이 그분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토록 가혹한 죽음을 당해야했던 것이, 99%가 아니라 100%의 믿음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대교회를 향한 요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옥한음 저, 교회는 이긴다, 국제 제자훈련원 출판, 2012.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응답해야합니다. 나의 믿음의 분량은 어디까지 와있는가? 내가 제자훈련을 마쳤다고 해서, 내가 성경을 10독했다고 해서, 내가 생각하는 그 믿음의 위치에 내가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어선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이고 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투명하게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몇 단계까지 왔나 계산하고 나를 평가하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 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기울여 청종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내가 어떤 위대한 믿음을 인스턴트로 모양만 취하려 했다면, 는 철저한 회개와 기본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하든지 나를 어떻게 인정해주는지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실하게 바라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결단, 내 앞에 놓여진 한 계단을 믿음으로 단단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