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31, 2014

분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의 훈련
출애굽기 40장 12-38절 (봉독: 34-38절)
2014년 1월 31일 금요 새벽 설교


우리 교회는 올해의 표어가 "사도행전 29장- 주를 향한 위대한 도전” 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이 마지막 장인데, 우리가 익숙한 이야기들처럼 결론이나 끝맺음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은 진행형으로 끝이나고 있다는 것에서, 그래서 지금의 교회가 29장을 써내려가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그 표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결말 또한 그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받아서 성막을 만들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나아가는 진행형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여정으로 말하면, 종착역에 다다르지 않은 여정 도중에 있는 가운데, 그들이 불과 구름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라고 말씀하면서 책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만약에 단순한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보는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결말이 시원하게 끝나야 좋아하시는 분들은 더욱 이같은 끝같지 않은 결말에 실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행형으로 마치고 있는 미완료의 결말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순간 속에서 말씀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도 이처럼 아직 그 끝을 모르는 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결말이 어찌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오늘이 중요한 것이고 앞으로의 일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음 속 한켠에 두고 오늘도 믿음의 발걸을을 떼야 하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기에 오늘 출애굽기의 끝나지 않은 결말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여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도착하는 그 곳에 다다르기 전에는 늘 불안하고 불확실한 순간의 연속입니다.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신 약속을 믿고 나아가지만 구체적으로 내일일이 어찌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가운데 강조하여 기록된 마지막 구절을 다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 여정의 확실한 미래와 결말을 보진 못했지만 그들이 본 것이 있는데 그 “그들의 눈으로" 본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회막위에 덮인 구름입니다. 그들이 성막을 다 짓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성막위에 충만이 임하였는데 구름이 떠오르면 그들이 나아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떠오를 때까지 멈춰서 나아가지 않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현재의 삶에서 앞으로의 일을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실히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 나타나는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하심을 분별하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여정이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도 교회에서 자주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시지요?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오늘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전진하고 멈춰서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이 그래서 참으로 중요한 영적 훈련입니다. 말만 들으면 굉장히 거창해보이고 특별한 은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로 보여지기 쉬운 것이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 분별하기라는 것은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매일 우리가 행해야하는 연습이요 훈련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을 은사나 능력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마치 긴장한 수험생들이 무슨 학교에 원서를 넣을 것인가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하고 묻는 것처럼 당장 내게 필요한 선택의 문제를 주님의 뜻을 통해 해결하려는 인간적 노력이 맞닿아 있는 것이 잘못된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묻는 것 자체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정답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순간 주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분별하고자 한다는 것은, 내가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민감한 영성을 가지고 살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정해놓은 범주 안에서 마치 객관식 문제처럼 이미 정해지고 박스안에 갇혀진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사실 주님 자신보다는 정답에 더 관심있는 사람입니다. 내게 놓여진 선택을 내려줄 우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정답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A가 하나님의 뜻이고 B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멈춰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뜻을 구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는 사람이 좋은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나라에 영성에 관한 저서들로 영향을 끼쳐온 헨리 나우웬은 그의 사후에야 출판된 그의 기록들 가운데서 ‘영적 분별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독특한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분별이란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역동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과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늘 주님의 뜻이 내게 확실이 들리지 않는다고 주님의 뜻을 구하고 분별하는 것을 멈출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묻고 구하는 것 자체에 핵심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주님의 뜻을 구할 때마다 내 마음이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Henri Nouwen, Michael T. Christensen, and Rebecca Laird, Discernment (2013)
나우웬의 기록과 강의록을 편집해 사후 출판된 저서로 한국어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음



오스왈드 챔버스도 그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묵상집에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주님께 늘 응답을 구하는데 주님은 종종 내가 원하는 응답을 주시기보다 그 분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은 두려움과 불확실성 속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착할 땅이나 미래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구름, 즉 자신의 영광과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땅 자체에 주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도 그 목적은 바로 주님 자신에게 나아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나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 우리가 연습해야할 영적 훈련이자 삶의 태도입니다. 매순간의 삶에서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낳은 선택들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나아가는 것이 분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물으면서 우리가 정답이 적인 선택지를 들고나가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오늘 주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모르는 상태, 즉 백지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이성적으로, 경험적으로 최선이 있고 차선이 있고 최악이 있는 정해진 범주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가정하고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이 주님의 뜻을 구하는 훈련입니다. 주님이 선택할 수 있는 1번과 2번을 정해놓고 둘 중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셔야 할까요?

주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게 당장 결정해야할 선택의 문제가 찾아왔을 때만 필요한 행위가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그의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뜻을 묻고 구하고 분별하는 삶이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영적분별에 대한 훈련과 습관을 매일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사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구름 임재로 인도함을 받기 전에 먼저 지어져야 했던 것은 회막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할 처소로서의 회막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회막을 짓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오늘 40장에 나타나는데, 첫째는 제사장들이 세워지는 것이고, 두번째는 성막과 그 안의 모든 필요한 물건들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지체된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머리에 기름부음 받았던 것처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주님 앞에 성결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서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구별을 받아 살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길 성막의 모든 구조와 그 안의 공간들이 준비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거룩하고 신령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훈련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구별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묵상하는 자리, 내가 정해놓은 시간에 주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오늘 이시간 처럼 새벽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리가 그 거룩한 시간과 공간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는 집 안에 내가 늘 묵상하는 자리가 주님의 뜻을 구하는 회막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지, 내가 상황에 매이지 않고 늘 지속적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경건의 비밀이 담긴 그 시간과 장소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곳은 단지 나의 필요와 나를 위한 주님의 뜻만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게 보내주신 많은 형제 자매들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 주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 마음 속에 불러오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삶 가운데 주님의 뜻을 구하는 중보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머나먼 여정을 행진하여 갈 수 있었던 것이 매일 인도하시는 주님의 역사하심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정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구하는 삶이고, 오늘 나를 인도하시는 그 주님을 구하는 것으로 인해 내일을 바라보고 계속 행진해 나가며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지는 것이 오늘 출애굽의 마지막에서 시사해주는 결말아닌 결말입니다. 끝나지 않은 결말임에도 은혜가 있고 소망이 생기는 이유는 그 주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 오늘 내 삶도 굳건하게 붙들어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나를 향한, 내 주변을 향한,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고 정하였다 할지라도 매일 묻고 분별하고 걸어가는 주님께 민감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Friday, January 24, 2014

[설교] 하나님의 소유로 산다는 것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
출애굽기 19:1-12
2014-01-24 금요 새벽 설교

마침내 애굽을 나와서 이제 시내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고자 모세를 산위로 부르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장면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것이 예수 믿고 살게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구원 과정과 닮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노예되고 죄에 노예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새로운 생명과 신분을 갖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마치 세례를 예식의 과정이 우리가 물 속에 있던 죽음에서 건져 올려져서 생명을 얻은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듯이 출애굽과정 또한 홍해 가운데를 건너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는 이야기의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고나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 애굽의 노예로, 바로의 소유로 살던 사람들을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이적과 심판을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적 의미에서 자유로움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자유함받은 것으로 구원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께 속한 바 되는 것이 구원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모두 할 수 있는 어떤 소속도 책임도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지요? 출애굽의 구원과정 또한 애굽의 노예에서 풀려난 것으로만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소유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에서 출애굽이 끝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현대인들에게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말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고 속박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것은 추구하지만 특정 종교에 소속되거나 교회에 나가지는 않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말은 그다지 흥미없는 일로 들리기 쉬운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은 아주 분명한 복음에 대한 사실을 간과해서 기인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유가 되던지 하나님의 소유가 되던지 둘 중 하나를 늘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6절 말씀에도,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기록하면서 18절 말씀에, “너희 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내 소유가 되겠고…”

죄의 종이던지 의의 종이던지 둘 다 택할 수 있거나 중간에 남을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도 이 중대한 변화가 남아있었습니다. 애굽을 나와 그들이 노예된 것에서 해방되었다 할지라도 온전히 출애굽을 한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세워지기 전에는 그저 유랑하는 무리에 불과하여 언제 어디서든 다른 제국들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운명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상의 노예로 살지 않는 단 한가지 방법은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는 내 소유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본문에 기록한대로 애굽을 심판하시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여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내가 교회를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의 노예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남는 방법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하는 문제로 남는 일입니다. 단 한번의 선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결정해야하는, 내 삶의 주권 (lordship)을 누구에게 드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너는 내 소유다. 내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매순간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매일 일나가며 집을 나설 때마다 ‘주님의 소유로 살겠습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로 살기 원한다면 주님을 닮는 것이 우선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내게 주어진 봉사와 책임과 헌금을 아무리 잘 한다한들 주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소유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5년만에 되찾아온 신장 결석으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고통스러워하다가 멀쩡히 안아프다를 한달여를 반복하다가 어제 아침에 돌이 몸밖으로 나왔습니다. (담임목사님과 다른 전도사님들이 안수기도해주었는데 응답해주셨나봅니다!) 그런데 이 돌이란 것이 1센트 동전보다도 작은 것인데 그렇게 큰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는 귀한 영적 교훈을 얻었습니다. 내 몸에 속하지 않은 무언가가 내 속에 있을 때 그것이 그토록 큰 고통을 몸에 주고 몸의 기능을 떨어뜨리더라는 것입니다. 크기나 겉으로 보이는 위험성에 상관없이 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은 결국 배출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단단하게 굳을 수록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 신앙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가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주님의 소유로, 주님을 닮아서, 주님의 일부로 살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고통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에도 문제를 야기하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모두가 다 한순간에 주님을 닮을 수 없다하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생각들과 방법들을 돌을 배출하듯이 내보내야합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수년 수십년간 쌓아오고 굳혀버린 삶의 방식들이나 생각들 고정관념을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속하지 않은 돌은 결국 몸에서 나가야 하듯이, 우리가 주님의 소유되었음을 선포하고 거듭난 순간부터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이물질인 것입니다. 그것을 내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과 훈련을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주님을 닮아 주님과 같이 되겠다는 결심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들과 닿을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 즉 너무나도 두렵고 이질적인 것으로 자주 묘사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을 닮기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 결코 작은 사소한 결심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살겠다는 것은 내가 어떤 훌륭한 위인을 본받아 살겠다는 정도 차원의 결단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유로 살라는 그 부르심은 인간이 이뤄낼 수 없는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라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거룩한 자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너는 내 소유가 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연한 연결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거룩하니 너도 내 앞에서 거룩할찌어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보이시고 그리고 나서 우리를 그 거룩함으로 부르십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였을 때 우리를 압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온전하심 앞에 어떻게 감히 우리가 당신의 소유로 살겠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너는 내 소유가 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주님은 그것을 요구하시고 부르시면서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산다는 것이 그래서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소유로 산다는 것이 비상식적이고 불편한 일이라고 하나님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소유로 산다는 것은 본래 불가능하고 우리의 인간적 연약함으로 이룰 수 없는 놀라운 삶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 것이다라고 약속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그 부르심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소유로 살기 시작할 때 오늘 나에게 구체적으로 일어날 변화들은 무엇일까요? 오늘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실 때 시내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이신 그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너를 내 소유가 되게 하겠다는 그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애굽의 노예처럼 세상의 속해 세상의 방법대로 세상의 소유물로 전락해버린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있다면 너는 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주님으로 부터 오지 않은 모든 삶의 이물질들을 내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결단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은혜 주실 것을 믿습니다.


Thursday, January 16, 2014

[설교] 한을 선으로

한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창세기 50:15-21
2014년 1월 17일 금요새벽 설교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북켐페인이라는 것을 하는데 올해 함께 읽게 될 책을 교역자분들과 함께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케리 슉, 크리스 슉의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책입니다. 읽던 중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에콰도르에 한 소수 부족이 있었는데 이 부족 안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인 해악을 저질렀을 경우에 그 사람을 찾아가서 창으로 찌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런 복수의 혈투가 벌어지곤 하였는데 결국엔 종족의 인구가 다 사라질 위기에까지 쳐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방법은 다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창을 들고 창을 던지는 삶을 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의 창을 찌르고, 분노의 창을 던지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창을 던지는 것은 멀리서 지켜 볼 땐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그 창을 맞아본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억울하고 한 많을 수 있었던 그런 인생입니다. 자신의 친모인 라헬과 첫째부인 레아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으면서 자란 그 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애정을 받고 자란 요셉이 뭐 그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겠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세요. 라헬을 더 사랑했던 야곱은 그녀의 아들인 요셉만을 유독 사랑하며 채색옷을 입히고 다른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도 그의 요셉을 향한 편애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아버지가 자신들의 어머니를 사랑해주지 않아 한 품고 살아가신 어머니를 생각만해도 분이 날 지경인데 배다른 동생 요셉에게만 유독 채색옷을 주며 차별 대우를 받으니 얼마나 그 마음 속에 시기와 분노가 많았겠어요. 같은 집에서 살면서 그런 눈치를 못느낄 요셉이 아니었겠지요. 때로는 차가운 시선이나 태도에서, 그들의 언행에서, 늘 차가운 벽이 존재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아가 오히려 그런 상처 때문에 더욱 튀어서 행동하며 형제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어린시절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야곱의 편애에서 시작된 가족 안의 상처와 분노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 시기와 질투를 만들어내고 결국 요셉이 형제들의 손에 팔려서 애굽으로 실려가는 인생의 큰 고난이 요셉에게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어요? 보통 사람 같았으면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속의 창을 들고 형제들을 원망하며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대인관계에서 받는 상처 중에서도 제일 아픈 것이 가족에게 받는 상처입니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아프고 괴로워도 집에와서 털어놓을 대상이 있고 나를 이해해주고 내 편에 서 줄 가족이 있다는 것에 위로 받습니다. 그런데 가족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그 상처가 여간 깊은 고통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나 그 상처가 깊이 오래 가는지 상처받은 사람의 자녀와 주변 가족들도 그 상처로 인한 가시에 찔리며 원한을 유전받고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라헬 또한 그렇습니다. 그녀가 품었던 원한과 분노를 자식들이 공감하고 배워서 똑같은 분노를 요셉에게 토해내지 않습니까? 그들이 받은 상처가 한을 만들고 그 한이 또다른 죄를 만들어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레아에게서 나온 형제들의 분노로 인해 요셉의 마음에 큰 원한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상처라는 것은 죄와 한의 끊임없는 순환고리를 만들면서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대인관계를 부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고통스러운 죄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요셉은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졌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만약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그의 상처에 대해 반응했더라면, 그가 마음의 창을 들고 원망하는 삶을 살았다면,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요셉의 고백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그가 그 상처의 고리를 깨고 용서하기로 결정했을 뿐더러 그 용서 가운데 하나님의 더 큰 역사하심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0-21절 말씀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나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요셉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 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먼저,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요셉이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하나님은"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믿는 사람들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인관계를 흔히 자신과 타인 사이의 선으로 이어진 관계로 흔히 생각합니다. ‘너'와 ‘나'로 이어진 선 사이에서 말이 오가고 감정이 오가고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가 이뤄지게 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의 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이차원적인 선의 관계 위에 하나님을 인식하고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너'와 ‘나' 사이의 화살표의 관계가 아니라 ‘너'와 ‘나'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세 차원의 입체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에게 입힌 해악을 인지하였습니다.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상처 주고 상처 입은 관계 속에 “하나님은"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받은 상처의 아픔 위에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셨는가라는 거룩한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도 이런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은' 이라는 말을 잊고 생각해내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지 않습니까? 진정 하나님을 내 삶의 주관자요 인도자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위치를 발견하고 인정할 수 있는 영적 분별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삶 속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내 주변을 돌아 볼 때 나의 대인관계는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그 관계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 관계들마다 하나님의 위치를 바라보고 있는 삼각형의 관계 입니까 아니면 그저 ‘너'와 ‘나'의 일직선적인 관계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위치와 임재를 인정하고 발견할 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서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형제들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그 해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이전에 내가 받은 상처와 해를, 하나님이 그분의 선으로 바꿔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관점에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입니다. 나의 관점에서의 선이란 복수의 차원에서의 정의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받은 해를 도로 형제들에게 돌려준다든지, 내게 해를 입힌 사람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선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셉은 하나님의 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수와 처벌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요셉의 삶에 일어난 선한 것들을 바라봄으로써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반드시 처벌받고 보수받아야 할 죄악들이 있습니다. 시편 말씀이나 예언서에도 악한자들을 응징해달라고 하나님의 정의를 되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말씀들이 자주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또다른 많은 경우 가운데, 특히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또 교회 지체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 요셉의 관점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에게 준 상처들을 통해, 또 그것을 하나님과 함께 치유해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수 있는 선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scar)를 별(star)로 바꿔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괴롭고 아픈 상처를 안겨준 사람의 잘못을 부인하거나 간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 또한 형제들이 자신에게 해입혔음을 인정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요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 삶 속에서 모든 관계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요셉의 삶을 통해 발견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용서입니다. 본론가운데 말씀드린대로 요셉의 용서로 인하여 다시 하나된 가족이 애굽에서 흥왕하여서 결국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요셉이 용서를 버리고 복수를 택했다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는 오늘과 같이 씌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요셉 자신과 형제들 사이의 원한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선을 통해 야곱의 자손들이 모두 기근으로 부터 구원받아서 애굽에서 자라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식량과 자원을 통해 야곱의 후손들을 수많은 사람들로 성장케 하셔서 나라로 세우실 것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요셉입니다. 우리의 용서도 단순히 원한관계 안에 국한된 좁은 용서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크리스쳔들이 용서나 내적치유를 이야기할 때 자신이 겪은 감정과 자신이 받은 상처에만 몰두하게 되는 경험을 가끔 하게 됩니다. 물론 치유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상처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용서하고 치유하고 훈련받고 나서도 여전히 내 내면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치유입니다. 나의 용서를 통해서, 치유되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살리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실지 내 용서의 저편 너머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용서한 그 사람을 통해 보호받고 치유받을 가족들과 교우들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것을 하나님 나라 비젼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닐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를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용서라는 것이 상황마다 너무도 그 방법도 다르고 의미도 달라지기에 용서에 관해 어떤 마스터 법칙을 만들기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요셉의 고백을 통해 묵상하는 것은, 크게 생각해서, 용서란 것이 첫째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다.라는 이 세가지 대원칙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내가 용서해야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나 상황이 지금 내 주변에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오랜 과거가 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해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작은 일부터, 또는 내 앞에 기도가운데 보여주시는 그 사람부터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용서합니까? 그 사람을 바라보기 이전에 그 관계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나 능으로 세워지지 않고 우리의 용서와 사랑을 통해 매일 세워져 나갈 것입니다.

Friday, January 10, 2014

[설교] 돌베개가 벧엘이 될 때

돌베개가 벧엘이 될 때
창세기 28:10-22
2014년 1월 10일 금요새벽 설교
찬송가 338장


제가 우리 교회에서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유학 온 청년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제 자신이 2005년에 유학으로 미국에 와서 적응하고 살다보니까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부담들에 대해서 말하지 안하도 잘 느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유학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까 머무를 유자와 배울 학자를 써서 머물면서 배우다라는 뜻이더라고요. 그런데 이 두 글자가 생각하면 생각 할 수록 참 공감되고 묵상하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머무름, 즉 다른 나라 또는 타지에 머물러야 하는 삶이라는 측면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배움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집이 아닌 곳에 머무르려다 보니까 모든 것이 낯설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아슬아슬한 긴장이 있습니다.


머문다는 것은 어떤 때는 생존을 향한 싸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아마존 정글에 홀로 내던져 진 것처럼 누구에게도 의지 할 곳 없이 내가 다음 달 먹고 살 궁리를 하고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나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광야같은 생활이 바로 머무는 삶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배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배움이 아니고요. 그렇게 홀로 스스로 낯선 곳에서 고생하며 나를 보살펴주고 내가 의지하던 집을 떠나있을 때 진정한 배움이 시작되더랍니다. 그래서 저는 유학온 청년들에게 이런 점을 강조합니다. 머무는 것과 배우는 것을 둘 다 잘해야 한다. 머물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나가서 일하고 뛰어다니면서 배움이 없으면 고국에 모든 것을 놔두고 이 먼 곳까지 온 너의 인생은 허비되는 것이다. 작은 고생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지식적인 배움은 있는데 머무름에서 오는 치열한 삶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을 얻고 학위를 얻고 나아가 원했던 직장을 갖게 될지는 모르지만 삶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광야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유학이라는 두 글자의 조합처럼, 머무름과 배움이 함께 가야하는 것은 단지 유학생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관점은 인생이 영원하지 않은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팔구십년 인생이 잠시 이생에 머물렀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머물려고 하시나요? 그냥 머물다가 떠나면 의미없는 인생입니다. 배움이 있어야 진정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왜 고생을 사서라도 해야한다고 하는 것인가요? 고생 자체가 의미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배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고생을 해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고생을 운명탓으로 능력탓으로 돌리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그 고생을 피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생을 나쁜 기억으로만 놔두고 넘기고 잊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가 없습니다. 그 고생을 하나 넘을 때마다 내가 반드시 무언가를 배워야 더 큰 성장이 있고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다라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많이 듣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변장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축복을 꺼낼 수 있는 믿음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이 머뭄과 배움을 동시에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14여년을 그의 어머니의 고향인 하란에서 유학하였습니다. 도망치듯 그의 고향을 빠져나와 그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낯선 환경으로 떠난 야곱은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청년 목장이 모이면 목자 집사님과 제일 중요하게 의논하는 것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왜냐하면 이민교회 찾아오는 유학생 청년들은 교회 오는 동기가 예배가 반이고 나머지 반은 밥이기 때문입니다. 따뜻하게 막 차린 집밥같은 밥을 먹으면 마음이 녹아지는게 누구나 경험하는 이민교회의 매력입니다.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젊은 청년들이 제일 정서적으로 힘들 때가 언제일까요? 매일 저녁 집에 들어섰을 때 매일 식사를 차려주시던 부모님이 더이상 함께 계시지 않다는 현실을 매일 알면서도 집들어가는 문에서 딱 맞닥뜨렸을 때 잠깐 드는 그 아련함이 제일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함께 계실 때 더 잘해드릴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기도 하면서 내가 내 인생의 책임과 무게를 다 짊어 져야하는 성인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야곱은 집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이쁨받는 아들로 자랐던 좋은 시간을 뒤로하고 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집에서 편안한 침상에 누워 자던 그가 오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돌베개를 베고 잤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시간을 무론하고 잠자리라는 것은 어떤 나라 어떤 문화에서든지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소이지요? 잠자리라는 것은 내가 거하는 공간 중 가장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도 그 잠자리가 없는 분들이 거리에 있다는 것이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숙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것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을 못자면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만큼 잠자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서 가장 안정되고 보호되어야할 공간이 그 잠자리가 지금 야곱에게는 돌베개가 되었습니다.


돌베개는 차갑고 딱딱하고 나에게 안정과 푸근함을 주는 잠자리가 아니라 나를 얼게하고 나 얼굴을 얼게 하는 고통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런 곳에서 잔다는 것은 쉬기 위해 자는 것이 아니라 버티지 못하고 잠드는 자리입니다. 단 잠을 청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해가 빨리 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는 그런 자리입니다. 인생으로 비유하면 돌베개는 내가 있고 싶지 않은 인생의 위치이자 내가 가장 밑바닥을 치는 그런 자리입니다. 오늘 새벽기도 나오신 분들은 이미 그 인생의 돌베개를 다 한번씩 가져보신 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주목해야할 것은 그 돌베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돌베개가 무엇으로 변하였으며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 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돌베개를 세워 기둥을 만들어 거기에 기름을 붙고 그 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밤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장소인 돌베개가 변하여 벧엘 하나님을 만난 장소, 예배의 자리,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새로운 놀라운 발견이 아닙니다. 인생의 돌베개를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실 거에요.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내가 부르짖고 만난 하나님이 내가 지금도 이 신앙 붙들고 살 수 있는 체험이 되지 않아요? 돌베개가 벧엘이 되는 것은 신앙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때의 회심이 그 후 내 인생을 이끌고 나가는 신앙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물론 우리 신앙이 언제나 처음 체험했을 때의 수준에 머물러서 기복신앙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경계해야되겠습니다만, 내 안에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체험만큼 분명하고 깊이있게 내 삶을 형성하는 체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돌베개가 벧엘이 되게 하는 믿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돌베개를 베고 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꿈을 꾸고 일어나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그저 꿈이었구나 하면서 불편했던 잠자리를 불평하면서 광야길을 터벅터벅 그렇게 희망없이 걸어갈 수도 있었을 법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일어나서 그전과 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일어나서 그 차갑고 무겁고 그의 삶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해준 그 돌베개를 세워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지나간 고통의 경험을 말씀안에 해석하고 그것을 세워서 기름부어 구별함으로써 내 영적 성숙의 발판으로 삼을 줄 아는 믿음이 변화를 가져오는 믿음입니다. 돌베개를 그냥 놔두면 그냥 돌베개 밖에 더 되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세워서 주님의 것으로 구별할 때 그 돌베개는 나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됩니다.


유학이란 단어가 머물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짧은 인생 세상 가운데 머물면서 돌베개를 만날 때 그저 머물러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배우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묵상집 첫장에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내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님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무엇을 해주실지,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말씀해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에 주님은 종종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보여주시고자 하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닥친 문제의 해결보다 그 문제를 통해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당장의 문제의 해결을 더 급하게 찾지만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더 잘 알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이다라는 말을 생각해볼 때, 그 변장한 축복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고난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 가운데 더 깊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을 이해하고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 아닌가 묵상하는 가운데, 저는 오늘 제 자신과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인생의 돌베개를 벧엘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을 취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주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인생 유학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주님을 더 알고 주님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이 땅에서 살기 위한 중요한 마음의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을 배우는 기회로 삼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내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을 배우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