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25, 2013

[설교] 약속의 하나님을 믿다


본문: 11:8-17
제목: 약속의 하나님을 믿다
2013 5 22일 수요예배 설교


I.
제가 대학생 시절 있었던 일입니다. 저를 양육해주던 학교 선배가 아침 묵상 모임을 같이 하면서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묵상 가운데 네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니? 잘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질문인데도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같이 성경읽고 묵상하고 내가 적용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도 그 질문은 제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었던 것이지요. 좋은 질문하나가 열 가지 정답보다 더 낫다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그 때 생각했습니다. ! 묵상이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인격적으로 더 잘 알기 위한 것인데, 내가 하나님 자신보다 오늘 나에게 당장 필요한 교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에만 급급해서 하나님을 생각조차 하지도 않고 있었구나.

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때로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나왔는데, 예배 가운데 나를 만나주신 그 분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이 그 자리를 떠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 예배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주목하였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나의 필요이던지,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나 환경이든지,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 예배와 묵상의 참 능력을 가로막는 다는 것이죠. 오늘 예배 끝나고 나가실 때 누군가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오늘 예배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손길로서의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해주신 은혜의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성품이고 속성이지만, 우리가 각자 처한 특정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목하도록 그 때 그 때 나타내어 주시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써 표현한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연애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은 이런 장면들이 익숙하실거에요. 남녀가 만나서 막 연애를 시작하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만나고 돌아와서 자기 단짝 여자 친구를 커피숖 같은데서 만나지요. (대개 그 단짝 친구는 남자친구가 없습니다 ^^). 그러면 친구가 이 여자 주인공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 어땠어? 그러면 이 여자 주인공이 매일 똑같은 상투적인 대답을 할까요? 대개는 안그렇습니다. 오늘은 무슨 무슨 이야기를 나눴고,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 저렇게 대해줬는데, 오늘 보니까 이런 이런 모습을 가진 정말 좋은 사람이더라…’ 그렇게 얘기하겠지요. 만나는 그 날마다 다르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인격적인 집중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의 마음과 입술로 하나님, 주님은 이런 이런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진정한 예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속을 꽉 채우고 있는,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또 내가 주목하여 바라보게 되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있어야, 살아있고 역동적인 하나님과의 동행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 한분 한분 모두가 그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매일 매일 그분의 성품을 집중하여 묵상하고 예배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II.
오늘 본문 가운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그런 특별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너무 잘 아시지요? 구약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약속을 맺으시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성경의 두부분을 구약신약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두 약이 먹는 약이 아니고 약속할 때의 "약"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가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성경 속의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기 원하신다는 것이죠.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언약, 즉 약속을 맺으시고, 그들을 그 약속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제가 지금 계속해서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저에게는 굉장한 힘이 있고 엄청난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부족한 사람, 실패 투성이인 인간인 나에게도 주실 약속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과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궁금해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시라면 도대체 그 약속이 무엇인지, 내 인생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합니다.

III.
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요? 왜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붙들어야 될까요?

첫째로, 우리가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이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심 없이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는 먼저 약속을 주시고, 그리고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장이라고 하는 유명한 구절들이지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의 예를 들면서 믿음의 표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11장에 쓰인 단어들을 잘 보시면 믿음이라는 말만큼 많이 쓰인 또 다른 단어가 약속이라는 단어입니다. 약속이 있기 때문에 믿음도 가능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아무런 준비 없이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비하신 약속 가운데 우리를 부르십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구하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거짓 약속들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지 않으면 끊임없이 우리 눈 앞에서 마르고 시드는 세상의 약속들에 상처받고 살게 됩니다. 내가 세웠던 계획들과 소망들이 무너지는 경험이 우리 인생가운데 때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을 때에도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상처받고 좌절하여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장의 실패가 끝이 아니라 예비하신 약속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사실, 사역이던 개인의 진로이던, 어떤 문제든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렇게 무너졌는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이 실패 자체가 가져오는 아픔보다 더 큰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그 곳을 뚫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나를 그분의 길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저도 이제 사역자로 헌신한지 10, 미국에와서 교회사역을 섬긴지 만 8년이 되어가는데요. 제 마음을 뜯어보면 수많은 실패와 좌절로 난 상처들이 아직 은혜안에 아물고 있는 중입니다. 유학생으로 처음 미국와서, 영어권 중고등부 사역을 하면서, 수없는 시행착오와 쏟아지는 비판으로부터 제 자신을 지켜나가야 했던 시절들이 있었죠. 정말 마음이 어려운 상황이 있었는데, 내가 이 예배만 드리고 짐싸서 한국간다. 그렇게 마음 먹고 예배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기도하던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가 한국에서 나올 때 친구가 저에게 줬던 약속의 말씀 카드를 기억나게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하신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형통하게 하고 너로 형통케하는 자가 되게할 것이다라는 약속이었는데요. 그 순간에 저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지금 피할 수 없는 내 실패와 연약함 뒤로 도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할 것인가? 지금도 매순간 그 선택의 고민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일의 성공이나 실패여부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약속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주어진 순간에 순종하여 헌신하면 나머지는 하나님 몫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이 우리를 삶의 도전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여러분께 여쭤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약속의 하나님을, 취직이 되지 않고, 신분 문제가 해결 되지 않고, 내 계획이 좌절되고 무너지는 그런 순간에도 신뢰하기 원하시나요?

IV.
오늘 본문에 소개된 아브라함의 믿음도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받들고 모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그것을 믿고 나아가는 삶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야곱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 11:8-10)

여기서 네 가지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믿음, 둘째는 부르심, 셋째는 약속, 마지막으로 넷째는 바랐음이라” 입니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그의 믿음의 여정의 기초가 되는 네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믿음, 소명, 약속, 그리고 비젼 (바라봄)이라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는 서로 다른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목적지 중간 중간 서는 정류장처럼 서로 순서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지요?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순종하여 그 약속을 믿었을 때 그 마음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땅을 '바라보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비젼이 생긴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영어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looked forward 앞을 바라보았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 여기 계신 모든 사람들을 향한 또 우리 교회와 각각의 사역에 대한 그 분의 약속을 우리 가운데 들려주기 원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그 사역과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무지하다면 우리는 보험 없는 인생, 위험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않고 나아간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밤새도록 씨름하면서 놔주지를 않잖아요. 그가 요구한 것이 무엇이지요? 주께서 내게 축복하시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을 주시지 않으면, 내가 이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붙들고 메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약속을 구하고 믿음으로 따라 나설 때 우리는 현재의 삶 너머를 바라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리게 됩니다.

V.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비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본문속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원하시는 비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홍성사라는 기독교 출판사를 세우신 이재철 목사님은 비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그의 시선이 목전을 뛰어 넘어 자신의 시선이 닿아 있는 더 먼 곳, 더 먼 시간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루가 다르게 내일을 향하여 새로워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재철, 2000, 홍성사, 71).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비젼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우리가 비젼이라는 말을 명사로 사용하다 보니까, 비젼의 의미가 마치 어떤 정해진 미래의 모습이나 정형화 된 꿈, 직업이라는 의미로 축소되어버렸는데요. 비젼은 동사형으로 바라보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젼은 계속해서 바라보고 내다보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갔을 때, 그가 바라본 것은 어떤 구체적으로 정해진 모습이 하나도 없는 마치 안개로 가리워진 듯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한걸음씩 떼어 나아갈 때, 인생의 정해진 진로와 길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이생의 삶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해진 종착역을 미리 보여주시지 않고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믿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서 걸어나가도록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참 답답한 일입니다. 약속은 주시는 데, 그 약속이 100%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안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될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았는데, 그의 삶을 보니까 그저 늙은 나이에 이삭이라는 아이하나를 두고 잘 기른 것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귀한 약속을 받았는데,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작아보일 수 있습니다. 그 약속으로부터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졌던 믿음이 무엇이지요? 11절 말씀에 보시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알았음이라.

사라가 힘을 얻은 것이 무엇으로부터라고 하지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가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에게 다가올 미래와 진로에 대해 그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고 원스텝 투스텝 그 걸음을 떼어 나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다른 이방신들이나 점쟁이들처럼 너는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안개 속을 걸어가듯이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비젼으로 삼게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훈련이요 이땅에서 우리가 천국에 다다르기까지 거쳐야할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약속입니다.  
물론, 그것이 세상에서 모든 일들은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면, 성경에 또다른 하나님 자신을 비젼으로 삼고 살았던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가 하나님 주신 꿈 때문에 형제들의 시기를 사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후에 애굽의 감옥에 갖혀서 인생의 모든 진로가 막혔습니다. 그 때 그가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나요? 아니요 몰랐습니다. 창세기 42장에 보면,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나서 자기 형제들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꾸었던 그 꿈을 기억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요셉은 하루 뒤의 일어날 일조차 모르는 안개같은 삶 속에서 하나님 자신만 바라보고 매일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전진하다가 보니까 노예로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는 재무관리의 훈련을 받고, 감옥에서는 함께 갖혀있던 정치인들로부터 애굽의 사정을 배우는 준비과정을 자신도 모르게 거쳐갔던 것입니다 (이재철, 77쪽 참조).  

비젼을 갖는 다는 것은, 내가 어떤 정해진 목표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약속의 하나님 자신을 믿고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떄 나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실현이라는 이기적인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이라는 큰 언약 속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세상적 기준에서 어떤 모습의 삶을 살고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약속과 계획이 이뤄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바라보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약속의 최종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 즉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사역하고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역이 성공하고 잘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약속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제가 참 두서없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기도와 집중을 요구하는지 준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다시 깨닫게 되었는데요.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삶 속에서 경험한 실패와 좌절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믿음을 마음 속 저 한켠에 묻어두고 신앙생활하고 있으신 분이 있으시다면, 하나님 주신 비젼이라고 믿고 이민이나 유학을 와서 현실의 벽 속에서 내 믿음이 연약하졌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변함없는 그 약속을 가지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내 삶 속에 무너진 것이 있다면, 더이상 그 무너진 성벽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약속의 하나님을 다시 찾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미국에 셰인 버나드라는 찬양가수가 쓴 곡 가사 중에 나오는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나는 어떤 길로 가야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 내가 바라 볼 수 있는 것은 내 눈으로가 아닙니다. 나는 눈이 가리운 채 세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싸움꾼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또 다른 눈을 주셔서 그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자신을 상처입히고 있는 내 속모습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도 주님을 향해 걸어가겠습니다. 나를 인도해 주세요. 나는 주님 당신의 것입니다” (Shane and Shane, "Eyes on You," 2013, in the album, Bring Your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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