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23, 2012

[생각] 불안감에 대하여


오전에 잠깐의 시간을 내어 읽은 김난도씨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눈에 띄는 문구가 크게 첫 챕터를 여는 장에 씌여있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1장 표지






김난도 씨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인생을 시계에 비유해보면, 인생 80을 24시간이라고 보았을 때, 나이 24살이면 겨우 7시 14분이다. 보통 직장인들이 막 준비를 마치고 대문을 나설 시간이라고 표현하시더군요.

저는 20대를 넘어 이제 30대에 들어섰으니-- 김난도 씨의 비유를 빌리자면-- 아마도 버스정류장에서 무슨 버스를 타고 갈지 고민하며, 또 그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발 동동 구르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불안감. 그것은 더욱이 학생으로서의 삶을 남들보다 더 하기로 결정한 바보들이 반드시 싸워서 살아남아야하는 천적입니다.

다른 동년배들이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세상으로 뻗어나갈 때에, 도서관에 앉아서 또는 학비를 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짬내서 하면서, 아내와 자식을 어떻게 보살필까를 고민하는 것도 잠시...과연 내가 바라고 원해서 시작했던 이 일의 "결실"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

그래서 저같은 30대 가방끈 늘어진 사람들의 늘어난 학창시절은 그야말로 '아픈 청춘'의 연장입니다.

김난도 씨의 책을 통해서 오늘 발견한 작은 통찰하나는,
나를 불안하고 떨리게 만드는 그 자의적인 질문들의 답은 오직 "그대 눈동자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
신앙적인 생각으로는, 나는 내 소명을 위해 얼마나 (또는 어디로) 달려나갈 셈인가?

유학 (留學)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머무름 (留) 속에서 배움 (學)을 해나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머무름은 유진 피터슨이 이야기한 그네 뛰기 곡예사의 그네와 그네 사이에서의 떠있는 그 찰나와 같은 불안하고 위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c.f. 유진 피터슨, "한 길 가는 순례자" IVP 2001- 아래 그림 참조).




머무른다는 것은 안정감도 없고 편안한 내일에 대한 보장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 머무름 속에서의 수많은 자기 성찰들, 고민들, 질문들, 그 모든 도전과 싸우는 과정이 유학의 리얼리티가 아닐까요. 간혹, 그 머무름이, (유진 피터슨이 제자도라고 명명한 바처럼),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순례자로서 살아가는 모습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안주하고 정착된 삶 속에서는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들, 고민들...

내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인생들...

그것에 대한 반대정신 (antithesis)으로서의 삶을 배우는 시간이 지금 이 유학이라는 짧은 순간이 아닐까요?

김난도 씨는 인생의 시계가 모두에게 똑같이 흘러간다는 가정으로 글을 쓰셨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50대가 되어도 여전히 오전 8시인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시계는 저절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달구지를 굴리듯 내가 땀으로 피로 굴려나가는 것입니다.

김난도 씨 말대로 정말 내 "눈동자 속"에 정말 답이 있다면, 나는 그 "답"이라는 것이 최소한 두가지의 나의 질문에 답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첫째, 나는 왜 지금의 이 달구지를 굴리고 있는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둘째, 그 달구지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내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김난도 저, 쌤앤파커스 출판사 (2010)











Friday, January 20, 2012

[설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목: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본문: 로마서 12장 1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고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금 기억하게 됩니다. 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예배는 행사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래서 "예배"라는 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배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오늘 제가 이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과 생각해 보고 싶은 질문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는 설날연휴가 시작되기 때문에 서울에 북적북적 모여 살던 수많은 인파들이 귀성길을 이루면서 도심을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열시간 열두시간이 걸려서 힘들게 매년 고향을 찾아가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우리가 다 잘 알듯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우리의 전통 설날 인사이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짧은 인사말, 우리가 그냥 생각없이 던지는 인사말이지만 그속에 참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새로운 한해에 복을 많이 받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같은 문화권안에 있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새해 인사에 "복"이라는 단어가 따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또는 "새해에는 즐겁고 유쾌하길 바랍니다" 등등으로 인사하죠.
우리 한국문화는 "복"을 참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인사말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복은 우리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복은 사람이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사할 때,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 "새해 복 많이 생기세요," 이렇게 인사하지 않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지요? 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우리가 흔히 쓰는 새해 인사말 속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조상신, 아니면 다른 미신을 통해서 복을 받는 다고 믿었습니다

마치 바울이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할때, 이방신전에 "알수없는 신에게"라고 씌여진 문구를 보고 바울이 설교하기를,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사 17:22-34) 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믿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복음을 전하였던 것 처럼,

우리나라도, 우리의 새해인사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우리 문화에서는 단순히 "기쁜 새해 되세요," "해피 뉴이어" 하지 않고, 새해 복을 많이 "받으세요"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뛰어 넘는 어떤 신적인 존재의 보호하심, 복주심 그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니까 알 수 없는 미신들에게 조상신들에게 그 복이 오기를 빌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했지만, 우리가 우리 전통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들을 발견하고 구속하면서, 그 복의 주체,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증거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혹시 한국에 친인척들에게 전화할 일이 있으시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시면서 그냥 의미없이 말하지 마시고, 새해 우리 주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 기도 하는 마음으로 하시면 그것이 중보기도가 되고, 복음의 씨앗이 되어서 하나님을 전하는 귀한 인사말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이 새해인사에 대해서 한가지 더 묵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는 복=돈 이라는 공식이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말 대신 "새해 돈 많이 버세요"라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종종 봅니다. 물질이 복을 대신하고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 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는 물질이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로 바꾸는 것은 십만원 짜리 수표를 1불짜리 미국 화폐롤 바꾸는 것이랑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으로 축소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73편에서는 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내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복의 결과 중의 하나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복은 복을 주시는 분, 복의 근원, 하나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잠깐의 만족, 잠깐의 복의 결과물 때문에 그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관심을 끊어버리는 경우를 정말 종종 보지 않나요

하나님께 늘 가까이 있는 것,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복있는 삶의 비결이자 예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는 마음없이 예배가 가능할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늘 예배하고 복을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주 부르는 찬양 중에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이런 찬양이 있지요. 매번 그 찬양을 부를 때마다,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다른 어떤 은혜를 구하고자 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부담을 가지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은 복의 결과물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의 근원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의 결과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내 안에 실패가 찾아왔을때 절망하고 넘어집니다. 그렇지만 복의 근원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넘어짐과 깨어짐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경험적으로 알아가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물질적으로 잘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그 앞에 가까이 가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새해에 그런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말씀 속에서 세 가지 정도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사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삶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무서워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무서워하는 것은 비슷한 두려움이지만,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반면에, 경외하는 마음은,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앞에 순복하는 마음입니다.

참고할 만한 서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조이도우슨 저, 예수전도단 (2008 개정)


하나님을 진심으로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서 그분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일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 없이도 하나님을 좋아 할 수 있고 교회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도 예배하고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야만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레벨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뜻과 능력은 우리의 기술과 이해로는 그 범위조차도 잴 수 없는 지경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일터에서 사귀는 친구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경외하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동등한 두 인격체의 관계가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신 분과 티끌에서 와서 티끌로 돌아갈 나의 관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들과 동등되이 여김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육신을 입어서 자기를 낮추신 것입니다 (빌 2). 하나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고 대언했던 선지자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박국 선지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무엇이라고 고백하나요?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합 3:16)."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서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가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내 입술이 떨리게 하고, 내 창자가 흔들리게 하는 경험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일어나야합니다. 우리가 그런 두려움없이 사랑하고자 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에 서려고 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자신의 목적과 동기를 위해 사용하게 되고, 복의 결과만을 좇으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46편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내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청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잠언 기자는 이야기합니다(잠 1:7).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그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먼저 경외하고 그 앞에 두려움으로 청종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참고할 만한 동영상 링크 "Fear God" By Francis Chan (English)

두 번째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해야한다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어 보이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표현이라면, 하나님의 아버지사랑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자기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경외함으로 그 분을 예배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가갔는데 하나님께서도 두려움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조종하신다면, 관계는 깨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에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고 청종하지 않고, 버릇없는 아이들처럼 그 사랑을 무시하고 이용하고 배신한다면, 죄를 짓고 방황했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경외하는, 예배하는 마음이 만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의 건강한 관계가 시작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에 모세가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의 부모로 계시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은 우리를 (1) 보호하고 자기 목숨보다 (2) 소중하게 여기시며, 또한 우리를 (3) 훈련하시는 사랑입니다.     

지난 주에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 전에 한국에서 방영했던 특집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요. 총 3부작으로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첫 회에서 남극 펭귄이 그 새끼를 어떻게 부화하고 기르는지에 대해서 밀착 취재하고 발견 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남극에서도 가장 추운 계절인 겨울에, 다른 동물들은 다 남극을 떠나는 그 시기에, 알을 낳는 펭귄들은 새끼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생존 싸움을 벌입니다. 어미가 알을 낳으면, 아비가 그 알을 받아서 발등위에 얹고 배로 덮어서 한 달여를 눈보라 속에서 견뎌야 합니다. 어미가 바다로 나가서 식량을 자기 몸에 축적해서 돌아올 동안 아비 펭귄들은 10초만 노출 되어도 알이 얼어버리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다른 아비 펭귄들과 몸을 맞대고 추위를 버팁니다. 그동안 눈을 먹으면서 수분만 보충한 채 새끼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새끼가 부화하면, 자기 몸속에 저장해 두었던 영양분을 게워내어서 어미가 돌아올 때까지 새끼를 먹여서 기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황제 펭귄의 부성애는
자연 속에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을 잘 표현해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미 펭귄이 낳은 알이 얼지 않도록 발등에 올려 배로 감싸고 한 달여를 꿈쩍 않고 버텨야하는 그 강인함 속에서 숱한 경제적 어려움과 생활고에도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일터로 향하는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도 그런 모습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고 신명기 기자는 고백합니다.  우리를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중요한 힘, 즉 신뢰의 첫 단추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신뢰하지 않을 채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경외하고 청종하는 마음에서 무섭고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가까이 할 수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음성을 듣고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언뜻 보면 모순되어 보이는 두 인격체의 서로 다른 자기 표현들, 다시 말해서, (1)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과 (2)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아버지 사랑... 이 두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원하지만 죄와 육신 때문에 다가갈 수 없는 우리의 두려움과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하시는 사랑이 부딫쳤을 때 그것이 서로 튕겨나가지 않고 만나서 "화목"을 이루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다리가 놓여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사는 세 번째 방법은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로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은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할 때, 내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기뻐하고, 화목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되면서 고백하잖아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2-13).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처음 읽었던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통해서 권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 시간 마음 속으로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린 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함으로 시작 되는 일입니다. 나를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제단에 올려놓았을 때,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했을 때에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이삭을 구원하신 것처럼, 나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고 전적 의존의 삶을 살기로 결단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맡겼을 때, 내 안에 뒤로 돌아설 방법이 전부 고갈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 한 분 만을 믿고 따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삶의 길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참고할 만한 책, "전적 의존" 김길 저, 규장 출판사 (2011)

새해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을 우리가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두렵고 떨림으로,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온전히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믿음으로 이 새해에 출발하고 또 권하는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게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설교후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아버지사랑 이라는 두 주제 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앞으로도 더 많은 성찰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두려움)의 Rhetoric이 정치권력구조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에 대한 민중신학적 또는 후기식민주의적인 고찰도 필요합니다.
설교 후 다시 읽고 비평적으로 생각해 볼때, "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조금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 이해할 때 나타나는 신학적 또는 신정론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면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이처럼 "복"의 문제는 단순한 번영신학/기복신앙에 대한 비판 문제 뿐 아니라 신정론에 대한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설교나 사역현장에서 어떻게 소통해야하는 지에 대한 방법론 문제도 앞으로의 풀어야할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