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말과 샘
야고보서 3:1-12
2016-10-07
한 사람이 보통 하루 동안 몇 마디의 말을 하고 살까요? 여성은 20,000단어 남성은 13,000단어를 하루 평균 말하고 산다는 통계가 영국에서 있었고, 또 최근 다른 연구에서는 여성은 16,000,
남성은 15,000단어를 말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그15-16,000 단어 중에
꼭 필요한 중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된 것은 500-600단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통계였습니다.
말을 많이 하기는 하는데, 그 속에 정말 내용과 생각이 들어있는 말의 수는 작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해 주는 보고인데요. 말이라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특별히 허락해주신
능력이자 권세이지요. 이 언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지식이나 감정이나 영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복음의
역사까지도 전달 할 수 있는 것임을 볼 때, 말의 가치와 중요성은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아시는 시편 19편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사실 이 짧은 구절이 우리가 크리스쳔으로서 말하는 모든 삶의 원칙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 구절을 통해서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열납되기 원한다”라는 말씀은 주님께 받아들여지기 원한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기 원한다는 뜻으로 쓰여진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그것이 내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이든지, 다른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든지, 모든 말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인데요.
내가 한 그 말들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말들이 되기를 원하다는
것이 시편기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의 관점에서는 모든 입술의 말들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라는
영적인 원리를 발견한 것이죠. 주님이 우리 입술 가에 귀를 기울이시고 늘 듣고 계신 것입니다.
부흥회 강사님이 지난 주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나의 관찰자로,
나를 감찰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그분이 나의 모든 말들을 받으시도록, 나의 입술의
권세를 주님 앞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시편 구절에서 하나님께 열납되기 원한다고 한 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내 마음의 묵상입니다. 내입의 말과 함께 주님께 드려져야할 것이 나의
마음, 내 속사람인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말과 사람됨, 혀와 내면은 하나라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드려지길 원한다고 했을 때, 그 고백 가운데는
어떤 자기 드림 (giving of one’s self)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생각대로 말하지 않고, 내 기분대로 말하지 않고, 주님이 뜻하신 생각, 주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입술로 드리겠다는 것이죠.
내 마음의 왕좌를 주님의 주재권 앞에 내려 놓듯이, 나의 입을 주님께 드리는 결단이
순간 순간 속에 있어지게 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그 놀라운 말의 능력을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 귀하게
쓰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말씀이 바로 이 말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4-5절 말씀을 제가 다시한번 읽어보면,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혀는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배의 키처럼 우리 자신 전체를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혀가 잘못 사용되었을 경우에 어떻게 되어진다고 말씀하나요? 6절부터 이르는
말씀에 혀는 곧 불이다. 불의의 세계가 되어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 마치 지옥의 불과도 같이 모든 것을 허물수 있는 것이 혀에서 나올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 말씀에 이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6절-8절까지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성경말씀이 우리 몸의 일부인 혀를 부정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고, 혀는 나쁜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래 혀가 나쁜 것이니까 나는 말을 될 수 있으면 안하고 살아야겠다. 맞아, 나는 입이 항상 문제야 하면서 말 자체에 대해서 죄된 것으로 단정하게 되면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진정한 혀의 모습은 무엇이죠? 시편의 고백, 내 입의 말이 주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말이 항상 나쁜 것이니까 말을 줄여야지라는 소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나의 입술 자체를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 연습을 향해 나아가는 적극적인 드림이 결국 우리의 혀를 지옥의 불과 같은 악한 영향력에서 구속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는 능력있는
입술로 바뀌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드린다는 것은, 완벽해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드린다는 것의 의미를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 멜수없는 멍에를
지려고 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주님께 우리가 내 자신을 드리고 입술을 드리고 마음을 드릴 때,
주님이 완성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죠. 미완성이지만 드리기 시작할 때 주님이 손을
내미셔서 그 헌신을 완성형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가운데 동참해주십니다. 내 입술을 주님께 드릴 때,
내 언어생활이 말로인한 관계가 완벽한 가운데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내가
드릴 때 주님이 그것을 사용하시는 데, 그 경험이 계속 확장되고 증폭되어질 때 우리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1999년에 미국에 콜럼바인 고등학교라는 곳에 레이첼이라는 학생이 있었죠. 예수님을 믿고 그 분께 삶을 드리기로 결정하고 많은 실패와 실수도 경험하면서 질풍노도 같은 사춘기를 믿음으로 성장하며 자라나가기를
계속했던 이 학생이 어느날 학교에 갔는데, 총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학교에 갑자기 나타나 교실 교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쏴서 죽이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붙들고 너 하나님 믿느냐? 물으면서 죽이고 하는데, 레이첼이 머리에 총구가 겨뉘운 채로 그 순간에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의 삶은 전혀 완벽하지 않았고요. 많은 실수가 있고 연약한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순간에 주님께 열납되는 한마디, “Yes” 하나님을 믿는다.
그 한 마디를 주님께 적극적으로 드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되고 레이첼은 순교하였지만, 그녀의 죽음 이후에 미국 전역에 국기게양대 앞에 나와 아침마다 학생들이 기도하는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한국에서도 그 운동이 번져나가서 청소년 전도 운동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입술을 드린다는 것은요. ‘너 말조심해라’ 이런 의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혀가
순종케한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훈련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미성숙하고, 연약하여 우리의 혀가 불처럼 공동체를 다치게 하거나 나뉘게 하지 않도록
절제하고 내 스스로의 생각이나 의지로 말하지 않도록 나를 줄여나가는 연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조심하는 것에만 멈추지 말고요. 말씀에서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열납되는 입의 말이라는 것은
그 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입술의 사용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처음 서두에 15000마디의 말을
우리가 매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15,000단어 다 완벽하려고 하면 그것은 은혜의 신앙이 아니라 율법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가십이나 험담, 생명을 살리지 않는 말, 하나님이 원치않으시는 말들 먼저 줄이고요. 그 다음에는 한 단어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열납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박수치게 만드는 한 마디에서 부터 시작하시라구요. 레이첼이 순교전에 드렸던 그 한마디처럼 천국을 뒤흔드는 한 마디가 우리 삶 속에서 진동되고 나올 수 있다고 믿는 믿음으로 우리 입술을
하나님께 드리시라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그렇게 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세운 여인이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비가일입니다. 남편인 나발은 양을 삼천마리나 기르는 많은
목동을 거스리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죽고 광야에서 여전히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이 광야에서 용병으로
살아가고 있을 무렵, 이 나발이라는 사람이 양털 깎는 축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부하들을 보냅니다. 나발의 목동들이 목축하는 동안 지켜주고 그들이 해받지 않도록 도와주었었던
일들을 기억해서 오늘 좋은 날 음식과 고기를 나누어주기를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이스라엘 족속이자
갈렙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기름부은 다윗을 무시하고 천박하게 말하며 그 부하들을 쫓아보냅니다. 다윗과
그의 600명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분기로 가득하여 일어나 칼을 차고 나발의 집으로 달렸습니다.
나발의 모욕에 이성을 잃은 다윗, 그리고 나발의 재산과 음식을 탈취할 마음에 들뜬
600명의 용병들이 지금 나발의 집을 향해 다가오는 위기상황 속에서 아비가일이 걸음을 나서게 되지요.
먼저 상황을 알게 된 아비가일은 급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지고 다윗이 달려오는 길로 마중나가 엎드려서 나발의 어리석음과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서, 다윗을 축복합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축복하면서 한 말은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게 속에 싸였을 것이요.”이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끊임없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무엘 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적으로 낙담하고 침체에 빠져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나발이 모욕을 해오자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칼을 차고 단박에 달려나간 것입니다. 설교자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이 말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비가일이 한 말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다윗에게 하나님을 회복시켜주는 행동이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으로 가득찬 채 폭주하며 하나님의 사람답지 않은 못난 모습으로 달려오는 중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그렇게 텅빈 영혼으로 달려가는 다윗의 길 앞에 엎드려서 그의 방황을 막고 그 앞에 엎드림을 통해 다윗의 마음에
다시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혜와 계략으로 목숨을 구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아비가일이 말씀에 기록된 이유는, 그녀가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금 이끌어주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나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며 달려오는 그 사람 앞에 저주하고, 비난하고,
목소리를 높일 수 도 있었지만,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의 입의 말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이 갖고 계신 생각으로 말하였습니다. ‘야 이 도둑놈아!’하지 않고 ‘당신의 생명을 여호와께서 생명싸개로 지키실 것이다’라고 축복의 예언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주님께 입의 말을 열납케 해드릴 때 일어날
수 있는 역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입술의 말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능히 길들일 수 없을 만큼 불과도 같이 번져나가는 파괴적인 능력을 가진 우리의 혀가 주님께 순간 순간 드려질 때, 그리고 더이상 나의 혀가 아니라 주님의 혀가 되어질 때, 내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일 가운데 주님이 나를 사용하십니다. 사람들 사이에 말들이 오갈 때, 아비가일과 같은 성령의 감동된 한 마디가 그 대화에 연결된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갈등이
있고 분열이 있고 불평이 있을 때, 주님께 열납된 말 한마디가 공동체의 운명을 바꿔버립니다.
이처럼, 주님께 드려진 입술과
마음으로 살려면 아비가일과 같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샘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혀가 샘과 같다는 것이죠.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한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샘이 근원이 있는 것처럼, 혀에도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을 잘 가꾸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훈련이자 의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샘의 근원을 준비해야할까요? 준비해야지요. 베드로전서에서도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주님이 쓰실 수 있도록 나의 혀의 샘 근원에 준비해야 합니다. 아비가일은 어떻게 자신의 입의 말을 주님께 열납되게 드렸는가? 첫번째는 아비가일은 엎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의 전쟁속에 들어갈 때 내 생각과 내 위신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 수많은 말들을 쏟아놓습니다.
다른 사람을 내 의견대로, 내 생각대로 이끌기 위해 조종하기 위한 말을 하게 되죠.
그런데 아비가일은 엎드렸습니다. 다윗앞에 엎드림과 동시에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며 먼저 엎드린 것입니다. 내 말이 아니어도 주님은 일하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엎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자존심 못지킬까봐 두려워하고 하나님보다 내 생각 지키기에
급급하면 엎드릴 수 없습니다. 엎드림과 동시에 아비가일은 다윗의 영혼을 바라보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에게 부당하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처지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야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자기 중심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다윗의 영혼을 어떻게 바라봤지요? 긍휼함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이 생명의 위협속에 얼마나 두려움에 살고 있는 가를 바라보면서 그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주는 말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 속에서 아비가일같은 상황 만나시면 어떤 말을 선택하시겠어요? 누가 나를 해하려고 달려올 때, 어떻게 하시겠어요?
엎드린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예배하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찬송하는 입술로 어떻게 동시에 저주가 나올수 있느냐고 말씀하는데, 맞습니다. 우리의 입은 찬송하는 입이기 때문에 그 찬송이 진정한 예배로 드려졌을 때,
그 예배는 우리의 입술의 나오는 말들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결정지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 한 입술로 찬송하고 예배하러 이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이 무엇이겠어요?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입의 말을 통해 의미있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도록,
주님을 잃어버린 자들이 주님을 다시 찾게되는 진정한 영혼의 말들이 내 안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하루에 한 마디부터 그렇게 써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연습할 수 있게 해주시도록 저와 여러분 함께 기도하며 출발할 수 있는 오늘
하루 되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