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22, 2015

[설교] 겟세마네의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
마가복음 14:32-42
2015-01-23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복음서를 통해 알려져 있는 몇 안되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자세하게 예수님의 기도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이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예수님이 어떤 상황가운데 기도하셨는가? 이 질문들이 우리 마음 속에 들 때, 비로소 참된 기도에 한발짝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그 기도의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기도 또한 듣고 계심을 믿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더욱 격려받고 세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기도는 완벽한 자의 완벽한 기도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아무런 고민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가운데 완벽한 상황에서 완벽한 기도를 드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도에 들어가실 때 심경이 어떠했다고 말씀합니까?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또 “심히 고민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상황을 무시하시거나 체념하지 않으셨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신 성육신의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에게 찾아온 고민과 두려움을 오늘 말씀은 감추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의문이 들 수 도 있는데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그리 놀라고 고민하시고 슬퍼하셨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도 이런 고민과 두려움과 슬픔을 가져본적이 있느냐?’ ‘그렇다면 어서 와서 겟세마네의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라.’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온전히 무너질 것을 전후로 마가복음이 쓰여졌습니다. 두려움과 고민에 빠진 모든 초대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들이 집중해야 할 것이 두려운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잘 말씀해주었습니다.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심히 고민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앞장서서 봉사하는 직분자라고 사역자라고 앞장서서 다녔는데 막상 고난의 위기가 찾아 오니까, 마음 속이 놀라고, 슬픔이 찾아오고, 고민이 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해 보지 않으셨어요? 삶을 되돌아 볼때, 아니면 현재의 상황 속에서, 주님을 향한 내 믿음의 고백은 언제나 진실되었고 참 고백이었는데, 정작 내 육신의 감정은 떨면서, 주저하면서, 고개를 떨구게 되는 상황을 만나보지 않으셨느냐 말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주님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 속의 놀람과 슬픔과 고민을 감추지 말고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면서 뜻하지 않게 찾아온 고난을 만날 때, 우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놀라게 되고, 슬퍼하게 되며, 고민하게 됩니다. 어떤 고난도, 우리가 준비된 후에 찾아 오는 법은 없습니다. 설령 내가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도, 내가 어떤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해도, 고난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할 때 갑자기 찾아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길을 알고 계셨고, 공생애 시작부터 그 길의 끝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육신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즉시 해야할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들리지만, 오히려 믿음이 좋은 사람일 수록 고난이 찾아 올 때 기도하기를 주저합니다. 왜 주저하게 되는가? 마음 속에 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믿음이 이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통이 찾아오니까 심장이 떨리고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믿음에 또한번 좌절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찾아오는 유혹은 ‘아 믿음이라는게 별거 아니구나’ 하고 체념하며 자신의 믿음을 버리고 후퇴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는 것이죠. 또는 어떤 잘못된 반응을 하게 되느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체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줄수 없어서 내 안에 놀람과 슬픔을 감추고 기도를 할 때에도 자신을 감추고 기도하는 반응 또한 나타날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 혼란과 의심속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체면이나 자존심 다 버리고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어떤 의연함이나 경건한 모습보다도 도리어 절망가운데 메달리는 기도의 모습을 제자들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의지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특히 속마음을 잘 안들어내는 한국문화에서는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때, 자신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기도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제자들의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자신의 상황을 감추거나 마음을 속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꺼내어 보여드리는 기도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난 괜찮아’ ‘나 기도 필요없어’ ‘별일 아니야’ 할 수도 있었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신 것은 아닙니다. 신뢰하는 제자들에게만 그 모습을 나누셨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제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실족하여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목장에서 또는 사역하면서 리더의 역할을 맡은 분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주님 앞에 솔직히 나아가는 모습을 가져야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 속의 어려움과 분노와 여러 연약한 마음이 들 때 그것을 나누는 것에 분별함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하여 나누되 내 마음 속에 드는 시험과 고민들을 나 혼자의 비밀로 간직하며 강한 척, 견고한 척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첫마디가, “아빠 아버지여”였습니다. 개역성경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경건하게 표현되었던 것을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여기 개정판에 번역한 것은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빠 아버지가 더 정확한 번역이고 본문의 예수님의 의도를 더 잘 드러내는 번역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런데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경건한 어른들이 “아빠”라고 부르기가 좀 창피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여”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사람들이 주요 메시야로 부르는 위대한 선생이자 구원자 메시야로서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밀함 가운데 자신을 낮추며, 나아가셨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가 삼위 일체 안에 온전한 일치와 연합을 이루게 되는 핵심에는 예수님의 철저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자기 낮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모든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몸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것을 이루고자 하신 바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그 앞에서 아들로서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빠 아버지여라는 기도 안에 담겨 있습니다.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자신을 자녀로 인식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명망있는 사업가이든지, 몇 자식을 둔 부모이든지, 교회에서 다 고개숙여 인사 받는 어른이든지, 상관없이 “아빠 아버지여” 부르는 순간 나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자녀로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숨길 것도 없고,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가리울 것 없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 처음와서 참 어렵게 고친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전교인 새벽기도 오면, 개인 기도시간에 목사님께서 기도의 자리로 나가서 무릎꿇고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움직여 지지가 않습니다. 왠지 전도사니까, 애절해 보이면 안될 것 같은 거에요. 그냥 앉아서 점잖게 기도하고 싶은 거에요. 우리 교회 많은 남자 성도분들도 비슷한 마음이 있으실 것 같아요. 오죽하면 목사님이 ‘남자 성도분들이 앞에 나와 기도하는 것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시겠어요. 그런데 어느날은 새벽기도하다가 내가 무릎을 꿇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릎 꿇고 나서야 그 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내가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 했구나’ 내 안에 놀람과 두려움과 슬픔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구나.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두려워했구나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나오면 잠깐이라도 무릎 꿇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늦게나마 하게 되었어요.

“아빠 아버지여” 부르는 기도가 연약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모습을 갖추기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러 나올 때, 어깨에 힘주고 나오는 것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고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 주변의 신뢰하는 지체들에게 진솔한 기도 제목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믿음을 가진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역을 위해서 중보도 하고 예언도 하고 사람들 앞에 영적 거인으로 살면서, 자신안에 있는 내면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님 앞에 들고 나오지 않는 이중적인 교인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가 끊임없이 “아빠 아버지여”부르짖고 나아가지 않으면 영적 가면을 쓰게될 유혹이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강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관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를 더 많이 부를 수 있느 사람이 기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가 5만번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알려졌습니다. 그가 위대한 영적 거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까지도 기도할 수 있는 아버지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기도응답이 적을까요? 기도할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은 아닌가요? 내가 평소에는 전혀 기도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들이, 우리가 “아빠 아버지여” 부르며 자신을 낮추면 기도의 제목들로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구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진다는 것이죠. 내가 아버지여 부르기 전에는 문제로 보이지조차 않았던 것들이 교만한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나면 부르짖음의 기도로 바뀌어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문제, 중보의 제목들, 세상의 아픔들 앞에서도, 우리가 아빠 아버지여 부를 때 성령께서 기도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까? 겟세마네 기도의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줄 믿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겸손의 사람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오늘 배우고 받아 참된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