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4, 2015

[설교] 꾸준히 걸어갈 힘 (욥 17:9)

꾸준히 걸어갈 힘
욥기 17장 9절
2015-09-03


사실 우리가 성경통독하면서 제일 힘들어하는 부분이 레위기나 민수기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사실 더 읽기 힘든 책은 욥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는 율법을 나열한 것이 많다보니까 와닿는 것이 쉽게 발견되지 않아서 어려운 것이지 이해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욥기는 주석학자들도 책의 처음과 맨 끝은 이해가 잘되는데 중간은 일관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들을 자주 합니다. 그만큼 어려운 책이고, 주제도 무겁습니다. 고통을 묵상하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의로움에 대해서 수많은 생각을 정리되지 않고 대화의 형식으로 계속 풀어 쓰듯이 기록되어 있다보니까 묵상하고 통독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욥기는 그래서 부분 부분을 다 완벽히 이해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전체적인 주제를 마음에 기억하면서 이 본문에서 내가 발견해야할 지혜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더 효과적인 묵상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속의 욥의 발언은 욥이 친구들의 변론을 듣고 또 반론을 펼치고 또 친구들의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 대답하는 내용 가운데 나오는 부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욥의 친구들은 소문난 지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욥에게 해준 말은 욥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욥이 왜 고난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해 판단해주고 해석해주려고한 친구들의 말에 오히려 욥은 지치고 쇠하였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누구보다 애쓰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이유없이 고통과 질고를 겪으면서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의 지혜로운 친구들조차 그들의 조언 조차도 그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완벽하게 살려고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선을 행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 낙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두번 일어나고 끝나는 어려움은 오히려 이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나를 어렵게 하는 상황들이 지속될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자꾸 내 뒷덜미를 붙드는 것과 같은 어려움들이 있을 떄, 우리는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욥의 상태를 한단어로 요약한다면 바로 낙심입니다. 욥이 무너진 것은 의로움에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낙심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낙심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방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욥의 모습을 17장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1절부터 이릅니다.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낙심하면 제일먼저 일어나는 증상은 기운이 쇠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힘이 나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없습니다. 열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나의 날이 다하였다.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다는 것은 이제 삶에서 기대나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낙심하면 소망이 없어집니다. 예배가 기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소망하지 않게 됩니다. 무덤만 바라보고 사는 것같은 삶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낙심이 무서운 것입니다. 7절에서 욥은 또다시 이릅니다.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낙심하면 눈이 어두워 집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가 앞에 있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욥은 “나의 지체가 그림자 같구나”라고 말했습니다. 형체없는 그림자처럼 완전히 바닥에 드리워진 모습으로 나를 무너뜨리고 영적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낙심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낙심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영적 원리입니다. 힘들 수 있습니다. 간혹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면 안됩니다. 낙심이란 말이 무슨 뜻이죠? 마음이 아래로 떨어진다 (drop)는 뜻입니다. 마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낙심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때문에 고통받고 어려운일이 더욱 생길 때 조차 낙심치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하고 살때 낙심이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무엇이 보입니까?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큰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핍박과 조롱을 견디시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주님이 지키신 의인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해답이라고 보게 되는가? 그것은 욥의 고백들을 연속해서 읽어내려가다가 갑작스런 한구절이 불쑥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 욥은 친구들의 허망한 조언과 자신의 지속되는 고통 때문에 죽음을 묵상하면서 낙심에 빠져있습니다. 자신의 낙심을 하염없이 하나님과 친구들 앞에 늘어놓는 주저리 주저리 말 속에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한 구절이 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그리고나서 바로 10절부터는 다시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번역도 한글 성경에는 이 문장의 시작이 그러므로...라고 나오는데 영어성경에는 but 그러나라고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번역한 사람들도 이 문장이 도대체 앞뒤문장과 어떻게 의미가 연결되는지 확실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에는 그리고라는 말과 그러나라는 말이 같은 접속사로 쓰이기 때문에 번역상으로 이것을 확정짓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욥의 불평가운데 불쑥 뛰어나온 이 구절이 저는 욥의 불평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자기 입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고백하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의인은 그길을 꾸준히 간다.” 이 말이 참 여운이 있는 말입니다. 길을 꾸준히 간다는 것은 일정하다는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오든, 기쁜일이 생기든, 변함없이 매일 일정하게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실하게 걸어가며 주님 앞에 손이 깨끗하게 거룩함을 입은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하지요? 점점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한번에 갑자기 힘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꾸준하게 한 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순종하고 걸어나갈 때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주님 지쳤어요. 주님 힘들어요’ 고백하면서도 순종하고 버티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님이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거룩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힘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욥의 고백을 예수님의 삶에 비추어 보면, 이 말씀이 더 잘 와닿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멸시하고 핍박하며 멀리하고 배신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님은 오늘 욥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게 하신 말씀의 삶을 직접 증거하여 보이셨음을 알게 됩니다.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소명의 길을 꾸준히 가셨습니다. 그 길에서 조금도 치우치지 않고 매일 매일 걸어나가셨습니다. 낙심할 수 있었던 순간에도 예수님은 순종의 길을 가셨을 때 점점 힘을 얻어 마침내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은 멈추어 서지 않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낙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에서, 순종의 길에서, 신앙 여정에서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일정하게 신실하게 5년 10년 또는 20년만 걸어나갈 수 있다면, 우리 각자의 삶에서 맺어질 열매는 실로 엄청날 것입니다. 인스턴트의 순종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막상 좋아보여서 하는 순종은 누구나 얼마정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필요한 순종은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입니다. 꾸준히 갈 수 있는 지속성의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낙심이라는 것의 벽을 반드시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선할일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삶을 따라가면서 낙심을 피해갈 수 있는 영적인 장치가 여러분의 삶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낙심치 않도록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영적인 보호를 구하며 중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의인은 꾸준히 걸어가고 거룩함 가운데 점점 힘을 얻어가는 사람이라고 오늘 말씀은 이야기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기 원합니다. 점점 힘을 얻어가는 사람. 점점 지쳐가고 시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며 살 때 점점 힘이 붙어지는 신앙인이 되기 원합니다. 내가 그 낙심의 자리에 있었다면, 오늘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겸손히 나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주님 이 낙심의 수렁에서 나를 끌어내 주시고 정오의 빛같이 일정하게 나를 비추시며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임재로 나를 이끌어주세요. 오늘 말씀이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꾸준히 걸어가고...이 말씀이 주는 여운이 오늘 우리 하루의 삶 가운데 오래 깊이 남아있기를 기도합니다.

Thursday, April 16, 2015

[설교] 나의 분깃은

시편 73:21-26
2015-04-15 수요저녁예배설교

한국말 성경이 어렵다고 많이들 느끼시는데, 그 이유 중 많은 부분이 교회 밖에서는 더이상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깃이라는 말도 그런 예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성경 밖에서는 참 들어보기 힘든 말이지요. 영어로는 portion이라고 나오는데, 성경에서는 참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 말 사전에는 받아야할 몫이라는 뜻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어떤 전체 가운데서 내가 받을 부분, 내가 요구할 권리가 있는 내 것을 일컫는 말이지요. 이미 내 소유는 아니지만 내가 장차 또는 곧 받게 될, 내가 구할 권리가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상속금이지요. 부모가 죽고 재산을 남기면 형제들이 상속을 배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그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가정이 깨어지기도 하지요. 또 경제 사회에서는 주식을 사고 팔면서 얻는 배당금이라는 것이 분깃이라는 또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투자한 금액에 대해서 내가 도로 받게 될 내 몫의 부분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이 분깃이라는 말이 여러가지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때, 각 지파별로 나눠준 약속된 땅이 있습니다. 그것 또한 분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분깃의 땅에 들어가 살면서 그 곳에서 경작한 것으로 먹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요즘에는 분깃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사실은 다 어떤 형태로든 분깃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회사나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봉급을 받습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며 업체가 벋어들인 총 소득을 사람별로 몫을 나누어 분배해 주는 것이 주급입니다. 내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일했으면 금요일 퇴근할 때 가서 나의 분깃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시 됩니다. 그것은 내 몫인 것이죠. 내가 요청할 권리가 있는 것, 내가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곧 나의 분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서 받게 될 분깃이 있다는 점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온 이 자리에서도 우리가 얻어야 할 분깃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럼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분깃을 바라고 주 앞에 나왔습니까? 주님 안에서 내가 얻어야 하는 것, 내가 요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기대를 가지고 이 곳에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도 내가 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 있으시면, 빨리 목사님을 만나서 상담을 받고 훈련반에 들어가시든지 하셔야 할 것입니다 (웃음). 또 혹시 마지못해 나왔습니다. 바라는 것 없습니다하는 마음이 드신다면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자신 안에 은혜가 줄어드는 것을 속히 경계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보다는 좀더 나은 상태에 있다는 믿으면서, 오늘 이 질문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을 나의 분깃은 무엇인가?’ 종종 찬양 가운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고백했을 때, 내가 마음 속에 그리는 그 산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오늘 말씀 가운데 고민하고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주중에 말씀 준비를 하고 원고를 쓰다가 마음 속에 한 때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종종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자전거도 처음 페달 밟을 때가 가장 힘들 듯이, 찬양인도나 말씀전하는 것도 하다가 멈추다 하다보면, 다시 하게 될 때 마음 주파수를 다시 맞추고 튜닝하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어제 예배당에 오후에 나와서 노트를 붙들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뒤에 누가 와서 인사를 하는데 영어권 회중에 한 형제가 쉬는 날이라고 기도하려고 나왔다는 거에요. 그래서 저 신경쓰지 마시고 자유롭게 기도하시고 가세요하고 저는 앞에 계속 앉아서 가만 있는데, 뒤에서 간절한 기도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제 마음이 어찌나 부끄럽던지요. 우리가 주님 전을 저렇게 사용해야 되는데주님의 전을 사모함이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예배시간에 얼굴도장 찍으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이 필요해서, 주님의 전에 가서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마음 가지고 나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 형제가 정말 주님이 필요해서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앉아있던 저의 마음 속에서 이 성전이 달라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형제는 어떤 분깃을 바라보았길래 아무도 없는 시간에 이 성전을 찾은 것일까? 오늘도 우리가 이 성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 기대했던 나의 분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오늘 시편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데요. 바로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분깃이시다 (You are my portion for ever)”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당시의 통상적으로 쓰이는 분깃(חֵלֶק)이라는 말의 의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 고백이 참으로 충격적인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와닿는 단어로 생각해 보기 원하시면,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님/자매님의 영원한 주급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요? 마음이 좋아지는 분들이 있으시고, 또 기분이 묘하게 안되는데…’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내 생계를 위한 소득이 한 순간도 아니고 영-원히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까? 직장을 버리고 돈을 벌지 말라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어떤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우리에게 있어야 이 고백, ‘나의 분깃은 영원히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겠냐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시편 본문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시편 기자의 심경에는 심한 갈등과 씨름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세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면,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줄곧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요?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악인들이 누리는 번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말씀대로 사는게 사실 쉽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순종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시편기자가 잠깐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편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 주변을 돌아보니까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사는데도 고난이나 재앙이 없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시편기자는 고민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

선교지에서 헌신하는 가족들을 생각해보세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고생이 이루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신변의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자녀들이 선교지에서 언어와 문화로 혼란을 겪고, 지원해주던 교회가 문제가 생겨서 기도와 물질의 후원이 끊기는게 다반사요, 외로운 가운데 나는 왜 이 길을 걷게 되었을까를 묻게 되는 적이 왜 없겠어요? 얼마전에 케냐에서 가리사 대학의 학생 청년들 140여명이 4명의 이슬람극단주의자들에 의해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너 기독교인이냐 이슬람교인이냐? 물어보고 골라서 죽였다는 거에요. 이슬람 경문을 외워봐라 하면서 크리스쳔만 가려서 죽였는데 전교생의 4분의 1이 죽었다고 합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젊은 세대들이 이처럼 큰 영적 혼란과 시험에 빠지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노력해서 잘 살 수 있는 길이 너무나 좁은 나머지, 소망없는 땅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힘 좀 쓰거나 부랑배같은 사람들이 무리지어서, 이슬람단체에 가입하면 출세하는 거라고, 먹고 사는 것은 물론이고 힘을 주고 권력을 주니까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고통없이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런 극단적인 예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때로는 너무 쉽게 말씀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연민에 빠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씀 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맞아, 내 안믿는 친구들은 퇴근하고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러도 가고 쉬는데 나는 주말, 수요일, 토요새벽, 그리고 수시로 전화가 와서 불려간다교회가는게 참 고통이야.’ 잘못된 적용입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이 있으신 분들이 있는 것 같으시면 사랑으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적용입니다.”

그런데 반전포인트가 17절에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악인들과 불신자들을 부러워한 것이 정말 어리석은 것이었음이,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서 깨달아졌다는 것입니다. 오만한자들의 눈에 보이는 안락과 즐거움과 평안 뒤에 있는 영적 실재를 보게 된 것이죠. 마치 아까 이야기드렸던 그 형제가 기도하러 이곳에 나왔을 때 바랐던 어떤 분깃이 있었던 것처럼, 성소에 들어갔을 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깨달음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회개합니다. 21절에,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짐승같이 어리석은 존재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자신의 의심을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기자가 고통스런 고민 끝에 성소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고 내린 결론입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세상의 번영과 안락도 결국엔 날아가 버릴 티끌 같은 것이요, 내가 구할 것은 나의 분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시편 기자의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그 하나님을 성소에서 만나야 되는 것만이 이 고백에 담긴 힘과 경건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길입니다. 아무리 붙들어 앉혀 놓고 주님이 너의 영원한 분깃이다 가르쳐도 마음으로 인정이 되지 않거든요. 무슨 뜻인지 와닿지가 않거든요.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는 것의 의미를 말씀을 통해 묵상할 때,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그 고백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나의 분깃이라는 것을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번째는, 나의 분깃은 하나님 자신이다. 둘째는, 나의 분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셋째는, 나의 분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마지막 네번째는 나의 분깃은 곧 세상의 분깃을 버리는 것이다. 세상 분깃의 무익함을 깨닫고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저와 여러분의 분깃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을 나의 분깃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선물 자체 (gift)가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 (giver)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나의 분깃이 물건이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주신 일을 감사하고 칭찬하는 단계에서 하나님 자신, 그분 자체를 바라보고 높이게 되는 참된 예배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곤 합니다. 첫번째는 찬양의 단계이고 두번째는 경배의 단계입니다. 둘다 중요한 예배의 요소이고, 둘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대개는 찬양을 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 경배를 드리는 것으로 연결이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하신 일, 주신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만, 우리가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가 예배할 때 경배의 단계에서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이 날 위해 해주신 것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보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선물이 아니라 선물 주시는 분 자신으로 나의 만족과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분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독생자 예수를 통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할 때,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낄 때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얼마전에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를 보았는데요. 우주가 정말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인지, 그 거대한 규모안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우리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더라고요. 인터넷에 우주에 관하여 좀더 찾아보았은데요. 우주에서 가장 큰 별이 베텔리우스라는 항성인데 태양의 1000배 크기가 넘는다고 합니다. 태양이 지구의 109배 정도 거든요. 하나님은 정말 인터스텔라, 우주간 존재를 넘어서, extra-celestial, 우주를 초월하는 존재이시다.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한 속성이나 성품이나 은사 중의 부분 아니라 100%의 하나님 자신의 그 살아계신, 삼위일체의 인격이 나와 함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다른 분깃이 필요없다는 것을 우리는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다르신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나에게 주셨다는 인식이 없이는 진정한 분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죠.

두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수 있는 이 말씀의 의미는, 나의 분깃은 하나님의 마음 (heart)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분깃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민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을 분깃으로 받으면 더 이상 나의 소욕이 하나님의 마음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내 속에 들어오셨는데, 그분의 그 마음이 내 안에서 흐르지 않을수가 없잖아요? 주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점점 더 ALIGN하게 되는 것. 일치하게 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해야 그게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잖아요라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 마음 속에 선한 열정이 생겨나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분깃으로 받는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주요 성품인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 21절에 시편기자는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데요. 우리 말 성경은 양심이라고 의역을 했습니다만, 원어문자 그대로 이 구절을 번역하면, 내 심장은 썩었고 내 신장(kidney)은 찔림을 받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성경 상식이 있는데요. 구약시대 고대 근동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은 심장에서 나오고 감정과 모든 마음은 콩팥, 신장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내 심장과 신장이 파괴되었다고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소로 들어오고 나서 내 마음, 내 생각, 내 주관이 부숴지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이 내 마음의 반석이시고, 영원한 분깃이 되신다. 하나님의 심장으로 새로 이식받은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주님 앞에 주님이 나의 영원한 분깃입니다고백할 때, 동일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겠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도덕적 부담감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사모함과 믿음으로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며 사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멋지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최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분깃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도 동시에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32 9절에 보면,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깃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분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급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보상 다른게 아니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분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썩어가는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분깃으로 인정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생각할 의미는 이렇습니다. 나의 분깃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갖는 것입니다. 당연한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 자신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키워카게 됩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축복을 누립니다. 또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속에서 자라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봅니다. 전혀 모르고 지내던 사람도 많은 말을 섞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친밀함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죠. A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함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또 반대편에서 B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점점더 친밀해지고 있습니다. 그 두 A,B라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지혜와 평안과 능력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이 나를 어찌 생각하시는지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를 어떻게 친구로 여기시는지 가까이서 그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힘과 에너지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래서 즐겁고 보람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자신을 분깃으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반쯤 열어놓고, ‘주님 손만 들어오세요. 내 마음이 준비가 덜 됐습니다. 주님 발만 일단 들여놓으시죠. 내가 아직 두렵습니다.’ 그렇게 막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을 활짝 온전히 열어서 하나님 자신을 마음에 들이셔야 되는데, 아직 여러분 중에 그 문을 완전히 열지 못하고 망설이시는 분들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 문고리 잡은 손을 놓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망설이고 계시는데, 내 마음 속에 지금 떨림이 있고 긴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성령의 감동이 내 마음에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와 소설에서 주인공 아이들이 옷장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옷장 문을 열고 그 세계로 뛰어 들어갈 때까지의 결단이 많은 것을 변화시킵니다. 마음을 활짝 열면 진정한 분깃이 내 삶에 빛처럼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없어도 되는 선택요소로 놔두고 신앙생활할만큼 무가치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옆에 분에게 한번만 더 인사해 주시기 바래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가능한 것입니다. 형제님/자매님이 취해야할 분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는 고백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분깃들의 무익함과 유한함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분깃으로 받는 경험은 우리에게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더 갈망하게 합니다. 안믿는 분들이 제일 이해안되는 대목일 거에요. 도대체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게 어디있냐고 물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분깃이라는 고백은 무엇이 부수적이고 무엇이 근본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신앙관을 갖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꿈을 가져라. 비젼을 품어라. 하나님을 믿고 도전해라.” 그런데 요즘은 사역자분들이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요즘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갖고 있는 꿈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비좁은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냥 꿈을 가져라고 말하면 전혀 엉뚱한 길로 나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명, 공동체와 사회의 유익, 인생의 의미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안정된 직업소득의 증가이 두가지만 바라보고 그 카테고리 안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꿈의 전부가 되어버린지가 이미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분깃이 아니라 세상의 분깃으로만 그들의 마음과 눈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되겠다고 기도했을 때, 대통령이라는 직업과 돈만을 생각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에 20세기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직업과 소득만을 바라보고 세상의 분깃을 찾아 그들의 꿈을 이루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현재보다 훨씬더 어둡고 어려운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척박하고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만, 우리의 이전 세대는 하나님을 자신의 분깃으로 여기는 크리스쳔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바라보고 세상의 필요를 바라보고 자신을 헌신하는 소명의 사람들이 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좋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는 고백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나의 욕심들을 깨닫고, 정말 하나님 자신 외에는 나에게 다른 은혜가 필요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주목하시고 들어쓰셔서 사용하십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생각나는 신약성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가장 마지막 엔딩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베드로가 앞으로 가야할 십자가의 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하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아멘하고 따라갔으면 요한복음이 좀 더 일찍 끝났을 텐데, 베드로가 질문을 합니다. 옆에 있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주님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전 같으면, “불공평합니다하면서 화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예수님 외에 자신이 구할 다른 은혜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되묻지 않고 베드로는 그 길을 갔지요.

오늘 사실 나오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 잘안되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한가지만 제가 목표가 있습니다. 설교마지막에 찬양할 건데요. 말씀 다 나누고 나면 우리가 다같이 그 찬양 부를 때 그 가사의 의미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말씀을 통해서 이 찬양가사가 이런 뜻이었구나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서 찬양 가사가 갖고 있는 무게와 진정성을 그대로 느끼면서 하나님께 올려드릴수 있으면 전 미션 완성입니다.’ 이 찬양 (“나 무엇과도”)을 함께 부르면서 여러분이 다시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분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분깃을 바라고 주님 앞에 나오는가? 이 성전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깃이 뭔가?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어떤 은혜도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일까? 정말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내가 그것을 왜 생각해야 하는가?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 다해라는 이 고백은 주님을 나의 영원한 분깃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중심의 고백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온전히 마음으로 받아들여 100%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를 기다리십니다. 고백하고 나아가는 가운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님을 나의 영원한 분깃으로 인정합니다. 주님이 전부입니다. 주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주님 자신을 더 원합니다. 갈급한 심령 부어주셔서 깨달음이 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Thursday, January 22, 2015

[설교] 겟세마네의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
마가복음 14:32-42
2015-01-23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복음서를 통해 알려져 있는 몇 안되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자세하게 예수님의 기도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이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예수님이 어떤 상황가운데 기도하셨는가? 이 질문들이 우리 마음 속에 들 때, 비로소 참된 기도에 한발짝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그 기도의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기도 또한 듣고 계심을 믿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더욱 격려받고 세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기도는 완벽한 자의 완벽한 기도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아무런 고민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가운데 완벽한 상황에서 완벽한 기도를 드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도에 들어가실 때 심경이 어떠했다고 말씀합니까?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또 “심히 고민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상황을 무시하시거나 체념하지 않으셨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신 성육신의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에게 찾아온 고민과 두려움을 오늘 말씀은 감추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의문이 들 수 도 있는데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그리 놀라고 고민하시고 슬퍼하셨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도 이런 고민과 두려움과 슬픔을 가져본적이 있느냐?’ ‘그렇다면 어서 와서 겟세마네의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라.’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온전히 무너질 것을 전후로 마가복음이 쓰여졌습니다. 두려움과 고민에 빠진 모든 초대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들이 집중해야 할 것이 두려운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잘 말씀해주었습니다.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심히 고민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앞장서서 봉사하는 직분자라고 사역자라고 앞장서서 다녔는데 막상 고난의 위기가 찾아 오니까, 마음 속이 놀라고, 슬픔이 찾아오고, 고민이 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해 보지 않으셨어요? 삶을 되돌아 볼때, 아니면 현재의 상황 속에서, 주님을 향한 내 믿음의 고백은 언제나 진실되었고 참 고백이었는데, 정작 내 육신의 감정은 떨면서, 주저하면서, 고개를 떨구게 되는 상황을 만나보지 않으셨느냐 말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주님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 속의 놀람과 슬픔과 고민을 감추지 말고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면서 뜻하지 않게 찾아온 고난을 만날 때, 우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놀라게 되고, 슬퍼하게 되며, 고민하게 됩니다. 어떤 고난도, 우리가 준비된 후에 찾아 오는 법은 없습니다. 설령 내가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도, 내가 어떤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해도, 고난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할 때 갑자기 찾아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길을 알고 계셨고, 공생애 시작부터 그 길의 끝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육신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즉시 해야할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들리지만, 오히려 믿음이 좋은 사람일 수록 고난이 찾아 올 때 기도하기를 주저합니다. 왜 주저하게 되는가? 마음 속에 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믿음이 이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통이 찾아오니까 심장이 떨리고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믿음에 또한번 좌절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찾아오는 유혹은 ‘아 믿음이라는게 별거 아니구나’ 하고 체념하며 자신의 믿음을 버리고 후퇴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는 것이죠. 또는 어떤 잘못된 반응을 하게 되느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체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줄수 없어서 내 안에 놀람과 슬픔을 감추고 기도를 할 때에도 자신을 감추고 기도하는 반응 또한 나타날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 혼란과 의심속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체면이나 자존심 다 버리고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어떤 의연함이나 경건한 모습보다도 도리어 절망가운데 메달리는 기도의 모습을 제자들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의지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특히 속마음을 잘 안들어내는 한국문화에서는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때, 자신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기도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제자들의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자신의 상황을 감추거나 마음을 속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꺼내어 보여드리는 기도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난 괜찮아’ ‘나 기도 필요없어’ ‘별일 아니야’ 할 수도 있었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신 것은 아닙니다. 신뢰하는 제자들에게만 그 모습을 나누셨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제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실족하여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목장에서 또는 사역하면서 리더의 역할을 맡은 분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주님 앞에 솔직히 나아가는 모습을 가져야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 속의 어려움과 분노와 여러 연약한 마음이 들 때 그것을 나누는 것에 분별함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하여 나누되 내 마음 속에 드는 시험과 고민들을 나 혼자의 비밀로 간직하며 강한 척, 견고한 척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첫마디가, “아빠 아버지여”였습니다. 개역성경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경건하게 표현되었던 것을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여기 개정판에 번역한 것은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빠 아버지가 더 정확한 번역이고 본문의 예수님의 의도를 더 잘 드러내는 번역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런데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경건한 어른들이 “아빠”라고 부르기가 좀 창피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여”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사람들이 주요 메시야로 부르는 위대한 선생이자 구원자 메시야로서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밀함 가운데 자신을 낮추며, 나아가셨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가 삼위 일체 안에 온전한 일치와 연합을 이루게 되는 핵심에는 예수님의 철저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자기 낮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모든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몸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것을 이루고자 하신 바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그 앞에서 아들로서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빠 아버지여라는 기도 안에 담겨 있습니다.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자신을 자녀로 인식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명망있는 사업가이든지, 몇 자식을 둔 부모이든지, 교회에서 다 고개숙여 인사 받는 어른이든지, 상관없이 “아빠 아버지여” 부르는 순간 나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자녀로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숨길 것도 없고,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가리울 것 없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 처음와서 참 어렵게 고친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전교인 새벽기도 오면, 개인 기도시간에 목사님께서 기도의 자리로 나가서 무릎꿇고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움직여 지지가 않습니다. 왠지 전도사니까, 애절해 보이면 안될 것 같은 거에요. 그냥 앉아서 점잖게 기도하고 싶은 거에요. 우리 교회 많은 남자 성도분들도 비슷한 마음이 있으실 것 같아요. 오죽하면 목사님이 ‘남자 성도분들이 앞에 나와 기도하는 것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시겠어요. 그런데 어느날은 새벽기도하다가 내가 무릎을 꿇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릎 꿇고 나서야 그 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내가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 했구나’ 내 안에 놀람과 두려움과 슬픔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구나.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두려워했구나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나오면 잠깐이라도 무릎 꿇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늦게나마 하게 되었어요.

“아빠 아버지여” 부르는 기도가 연약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모습을 갖추기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러 나올 때, 어깨에 힘주고 나오는 것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고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 주변의 신뢰하는 지체들에게 진솔한 기도 제목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믿음을 가진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역을 위해서 중보도 하고 예언도 하고 사람들 앞에 영적 거인으로 살면서, 자신안에 있는 내면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님 앞에 들고 나오지 않는 이중적인 교인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가 끊임없이 “아빠 아버지여”부르짖고 나아가지 않으면 영적 가면을 쓰게될 유혹이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강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관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를 더 많이 부를 수 있느 사람이 기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가 5만번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알려졌습니다. 그가 위대한 영적 거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까지도 기도할 수 있는 아버지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기도응답이 적을까요? 기도할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은 아닌가요? 내가 평소에는 전혀 기도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들이, 우리가 “아빠 아버지여” 부르며 자신을 낮추면 기도의 제목들로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구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진다는 것이죠. 내가 아버지여 부르기 전에는 문제로 보이지조차 않았던 것들이 교만한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나면 부르짖음의 기도로 바뀌어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문제, 중보의 제목들, 세상의 아픔들 앞에서도, 우리가 아빠 아버지여 부를 때 성령께서 기도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까? 겟세마네 기도의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줄 믿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겸손의 사람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오늘 배우고 받아 참된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