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언어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시편 85편 9절-13절
2014-06-20 금요 새벽
시편을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을 잘 묵상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배우셨나요? 처음 예수 믿고 교회 나올 때 참 두려운 것 중 하나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많은 새신자 분들이 말씀하시는 거룩한 고민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기도를 하는가? 인격적이신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주님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참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기도의 언어'라는 것을 찾게 될 때가 있지 않아요? 내 마음 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내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사람의 생각과 뜻이 언어와 참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언어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어떤 언어를 통해서 내 눈이 번쩍 뜨이고 생각이 바뀌고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언어, 이 ‘말'이라는 것이 참 권세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언어로 주님께 기도하지만, 때로는 기도의 언어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방언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상 쓰는 언어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처한 상황과 내 마음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정확하게 과녁을 통과하는 화살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기도의 언어가 우리 안에 던져졌을 때, 그 기도가 내 삶을 바꾸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어진 적절한 기도의 말한마디 단어 하나는 우리의 닫혀있던 마음을 열어주기도 하고, 눈을 열어서 주님을 보게 해주고, 내 시선을 문제에서 돌이켜 하나님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능력있는 기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누가복음 11장에서 제자들도 예수님께 똑같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가르쳐주십시요. 참된 기도가 어디에서 시작이 될까요? 저는 우리가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주님 제 안에 기도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제 마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해 저조차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기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성령님, 제가 지금 기도 가운데 무슨 말을 하길 원하시나요?’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신자 분들이 기도할 줄 모르겠다는 그 고백이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기도에 익숙하다보니까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야 되는지 다 알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끊임없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늘 하는 기도, 내가 늘 간구하는 말들, 그 한계를 벗어나길 원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시편이 좋은 교과서가 됩니다. 수많은 기도들을 접하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내가 몰랐던 기도의 언어들을 발굴하게 됩니다. 그 기도를 읽고 묵상하면서 내 기도의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가 그가 처한 상황 속에서 찾았던 주님의 모습과 그가 주님께 드렸던 그 말들을 통해서 오늘 나는 어떤 기도의 고백과 말들을 주님 앞에 드릴 것인가 기대감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시편보다 못하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내 기도의 고백과 언어가 또하나의 시편이 될 수 있습니다. 꼭 장황한 문체나 한글 성경의 독특한 고어체로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끊임없이 하나님의 속성을 붙들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해나가며 세상을 해석하려는 그 오리지널함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시편만큼 우리 기도도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시면서 기도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85편 말씀의 키워드는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자체 속에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미 여러분이 읽으면서 느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고백하면서 앞으로 찾아올 새로운 회복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모든 회복의 첫걸음이자 시작입니다. 소망이 없이 시작되는 회복은 없습니다. 회복에 대한 소망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소망의 결과로 회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광복을 염원하기를 수십년을 계속했습니다. 시인 이상화씨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물으면서 꺼져가는 등불같은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광복을 염원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광복이 찾아 왔습니다. 그 꺼지지 않은 염원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운이 계속 이어져서 이후의 숱한 어려움이 찾아왔음에도 그것을 계속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요즘 잘 아시는 정치인 장로님께서 일제 식민 강점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말들이 많지요… 일제의 강제 점령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악 (evil)”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을 ‘선’으로 바꾼 것이 우리 민족들이 지녔던 끈질긴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잔인한 폭력과 압제 속에서도 사그러들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 소망과 신앙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현재라는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회복이 있기 전에 회복에 대한 소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언제 시작되는가? 누군가가 그 소망에 대해 말하고 외치고 선포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1절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힌트를 주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시편 기자는 지금 그 기나긴 포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그 순간에 이 시편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오랜 고난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발걸음이 처음부터 밝고 희망찬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과 나라와 성전과 모든 것을 이미 다 잃었습니다. 포로기 이전에 비해 돌아오는 백성들의 수는 아주 작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옛 영광과 민족의 정체성은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고, 이제 다시 나라를 세운다고 해도 성공할지 얼마나 갈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좌절의 분위기가 깊이 스며드는 그 상황에서 시편기자의 기도가 그들 안에 부재하였던 언어를 가져옵니다. 바로 소망의 언어입니다. 7절까지 지난 죄에 대해 또 용서에 대해 고백하면서 주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8절부터 시편 기자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올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하실 말씀을 듣겠다고 한 것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포로기 이전에 포로기 동안에 들었던 예언의 말씀은 그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왔다는 절망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제 하실 말씀을 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9절 말씀에 “진실로" 주의 구원이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땅쳐다보고 있을 때 ‘주님을 바라봅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불평하고 상황 탓하고 있을 때 ‘주님의 영광’에 대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프란시스의 기도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거에요. “주님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하소서.” 이 기도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은 바로 전환입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다툼에서 용서로, 분열에서 일치로, 반대되는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중보기도가들은 ‘반대정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반대정신으로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속한 상황에 미움이 많으면 그 반대의 정신인 사랑을 구하는 기도, 사랑에 대한 기도와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곳에 슬픔이 깊이 드리워 있다면 내 기도는 그들과 함께 슬퍼하면서 영원한 기쁨을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겠죠. 우리 기도가 깨어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면, 남들이 다 하는 기도, 당연한 기도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나와 내 주변사람들이 바라보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말씀을, 마치 어둔 방에서 촛불을 하나 딱 켜는 것처럼, 전환을 가져오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내가 구하는 것에서 이뤄지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탄식함으로 간구하심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통해 성령께서 간구하고 계시는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라고 선포하며 소망을 이야기하는 시편 기자가 과연 헛된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그 소망이 인간적인, 그저 사람들을 북돋기 위한 값싼 발언이었을까요? 하나님으로 부터 온 소망은 인간적인 격려와 헛된 약속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 있지 않아요? 화평 (8절)케 하러 오신이가 누구이시죠? 우리 안에 머물게 된 하나님의 영광(9절)이 누구입니까? 인애와 진리와 의와 화평이 모두 함께 만나고 의가 나타나 그 앞길을 닦은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소망을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어떤 기도를 할 것인가? 지금 내가 속한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관점을 불러오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마치면서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어졌습니다. 주님 나의 기도가 자라게 해주십시요. 내 속에 진정한 기도의 언어가 없습니다. 내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를 내게 주십시요.
저와 여러분의 기도자리 가운데 성령님의 공급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겸손과 인정입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요라는 제자들의 단순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서 드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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