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23, 2014

[설교] 기도의 시작

기도는 언어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시편 85편 9절-13절
2014-06-20 금요 새벽


시편을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을 잘 묵상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배우셨나요? 처음 예수 믿고 교회 나올 때 참 두려운 것 중 하나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많은 새신자 분들이 말씀하시는 거룩한 고민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기도를 하는가? 인격적이신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주님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참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기도의 언어'라는 것을 찾게 될 때가 있지 않아요? 내 마음 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내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사람의 생각과 뜻이 언어와 참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언어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어떤 언어를 통해서 내 눈이 번쩍 뜨이고 생각이 바뀌고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언어, 이 ‘말'이라는 것이 참 권세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언어로 주님께 기도하지만, 때로는 기도의 언어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방언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상 쓰는 언어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처한 상황과 내 마음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정확하게 과녁을 통과하는 화살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기도의 언어가 우리 안에 던져졌을 때, 그 기도가 내 삶을 바꾸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어진 적절한 기도의 말한마디 단어 하나는 우리의 닫혀있던 마음을 열어주기도 하고, 눈을 열어서 주님을 보게 해주고, 내 시선을 문제에서 돌이켜 하나님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능력있는 기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누가복음 11장에서 제자들도 예수님께 똑같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가르쳐주십시요. 참된 기도가 어디에서 시작이 될까요? 저는 우리가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주님 제 안에 기도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제 마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해 저조차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기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성령님, 제가 지금 기도 가운데 무슨 말을 하길 원하시나요?’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신자 분들이 기도할 줄 모르겠다는 그 고백이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기도에 익숙하다보니까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야 되는지 다 알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끊임없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늘 하는 기도, 내가 늘 간구하는 말들, 그 한계를 벗어나길 원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시편이 좋은 교과서가 됩니다. 수많은 기도들을 접하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내가 몰랐던 기도의 언어들을 발굴하게 됩니다. 그 기도를 읽고 묵상하면서 내 기도의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가 그가 처한 상황 속에서 찾았던 주님의 모습과 그가 주님께 드렸던 그 말들을 통해서 오늘 나는 어떤 기도의 고백과 말들을 주님 앞에 드릴 것인가 기대감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시편보다 못하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내 기도의 고백과 언어가 또하나의 시편이 될 수 있습니다. 꼭 장황한 문체나 한글 성경의 독특한 고어체로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끊임없이 하나님의 속성을 붙들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해나가며 세상을 해석하려는 그 오리지널함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시편만큼 우리 기도도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시면서 기도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85편 말씀의 키워드는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자체 속에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미 여러분이 읽으면서 느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고백하면서 앞으로 찾아올 새로운 회복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모든 회복의 첫걸음이자 시작입니다. 소망이 없이 시작되는 회복은 없습니다. 회복에 대한 소망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소망의 결과로 회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광복을 염원하기를 수십년을 계속했습니다. 시인 이상화씨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물으면서 꺼져가는 등불같은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광복을 염원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광복이 찾아 왔습니다. 그 꺼지지 않은 염원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운이 계속 이어져서 이후의 숱한 어려움이 찾아왔음에도 그것을 계속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요즘 잘 아시는 정치인 장로님께서 일제 식민 강점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말들이 많지요… 일제의 강제 점령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악 (evil)”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을 ‘선’으로 바꾼 것이 우리 민족들이 지녔던 끈질긴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잔인한 폭력과 압제 속에서도 사그러들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 소망과 신앙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현재라는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회복이 있기 전에 회복에 대한 소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언제 시작되는가? 누군가가 그 소망에 대해 말하고 외치고 선포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1절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힌트를 주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시편 기자는 지금 그 기나긴 포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그 순간에 이 시편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오랜 고난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발걸음이 처음부터 밝고 희망찬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과 나라와 성전과 모든 것을 이미 다 잃었습니다. 포로기 이전에 비해 돌아오는 백성들의 수는 아주 작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옛 영광과 민족의 정체성은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고, 이제 다시 나라를 세운다고 해도 성공할지 얼마나 갈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좌절의 분위기가 깊이 스며드는 그 상황에서 시편기자의 기도가 그들 안에 부재하였던 언어를 가져옵니다. 바로 소망의 언어입니다. 7절까지 지난 죄에 대해 또 용서에 대해 고백하면서 주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8절부터 시편 기자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올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하실 말씀을 듣겠다고 한 것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포로기 이전에 포로기 동안에 들었던 예언의 말씀은 그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왔다는 절망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제 하실 말씀을 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9절 말씀에 “진실로" 주의 구원이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땅쳐다보고 있을 때 ‘주님을 바라봅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불평하고 상황 탓하고 있을 때 ‘주님의 영광’에 대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프란시스의 기도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거에요. “주님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하소서.” 이 기도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은 바로 전환입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다툼에서 용서로, 분열에서 일치로, 반대되는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중보기도가들은 ‘반대정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반대정신으로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속한 상황에 미움이 많으면 그 반대의 정신인 사랑을 구하는 기도, 사랑에 대한 기도와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곳에 슬픔이 깊이 드리워 있다면 내 기도는 그들과 함께 슬퍼하면서 영원한 기쁨을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겠죠. 우리 기도가 깨어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면, 남들이 다 하는 기도, 당연한 기도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나와 내 주변사람들이 바라보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말씀을, 마치 어둔 방에서 촛불을 하나 딱 켜는 것처럼, 전환을 가져오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내가 구하는 것에서 이뤄지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탄식함으로 간구하심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통해 성령께서 간구하고 계시는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라고 선포하며 소망을 이야기하는 시편 기자가 과연 헛된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그 소망이 인간적인, 그저 사람들을 북돋기 위한 값싼 발언이었을까요? 하나님으로 부터 온 소망은 인간적인 격려와 헛된 약속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 있지 않아요? 화평 (8절)케 하러 오신이가 누구이시죠? 우리 안에 머물게 된 하나님의 영광(9절)이 누구입니까? 인애와 진리와 의와 화평이 모두 함께 만나고 의가 나타나 그 앞길을 닦은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소망을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어떤 기도를 할 것인가? 지금 내가 속한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관점을 불러오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마치면서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어졌습니다. 주님 나의 기도가 자라게 해주십시요. 내 속에 진정한 기도의 언어가 없습니다. 내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를 내게 주십시요.

저와 여러분의 기도자리 가운데 성령님의 공급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겸손과 인정입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요라는 제자들의 단순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서 드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Monday, June 9, 2014

[설교] 기쁨에 대하여


기쁨에 대하여
시편 16편
2014-06-10 새벽 설교

우리 교회에서 훈련교재로 사용하는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에서 단연 가장 잘 씌여진 이 책의 정수(essence)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마지막 단원인 “기뻐하는 훈련"이라는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 마지막 장의 시작을 이렇게 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의 핵심은 기쁨이다.” 이 말을 순간적으로 들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맞는 말인것 같으신가요?



예 맞는 말입니다. 기쁨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단순한 믿음생활의 결과 중의 하나인 것이 아니라 믿음 생활의 핵심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의 잘 알려진 고백도 같은 선상의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말하노니 기뻐하라.” 오늘 시편 16편 말씀도 기쁨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니까, 지금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은 뭔가에 쫓기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시편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좌절과 슬픔이 당연한 그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의 언어는 정반대의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에 “즐거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요. 결말인 9절 부터 11절까지 하나님의 기쁨에 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9절에 “나의 마음이 기쁘고"라고 고백하며, 마지막 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마지막절이 참 재미있는 구절이지요.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주의 왼쪽에는 뭐가 있을까요? 이 구절은 방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 많은 구절들은 짝 또는 세구로 함께 묶여져 있습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두 문장씩 세문장씩 반복해서 씀으로써 그 의미를 한층 강화해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구절의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라는 구와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구는 같은 뜻의 두가지 표현입니다. 그 뜻은 그러면 무엇이겠어요? 주님의 보좌는 기쁨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주님 곁에는 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분위기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가까이할 수록 삶에 기쁨이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고 계시는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 수록 분노와 두려움과 수치심이 커져간다? 그러면 그것은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할 증상입니다.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영성이 기쁨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기쁨”이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인식하는 기쁨과 같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또 믿음의 전통 가운데서 “기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취할 수 있는지 우리가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세상의 기쁨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주님의 기쁨”이라는 것의 다른 점을 우리 생각가운데 명확하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첫번째로, 주님의 기쁨은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잠시동안 머물다가 사라지는 기쁨은 감정이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쁨은 한시적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속되는"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필요합니다.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꺼지지 않는 기쁨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이 한시적인 이유는 그것이 기쁨이 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쁨은 슬픔가운데서도 고통가운데서도 꺼지지않고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기쁨을 감정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고통의 재 (ashes) 가운데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내면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웃고 있으면 기쁜 것이고 울고 있으면 슬픈 것이라는 외적인 의미에 갖혀있으면 진정한 의미로서의 기쁨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내가 감정적으로 기쁠 때이든지 슬플 때이든지 나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일어서게 하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나와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모든 것 가운데 승리하셨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기쁨이 내 안에 진정한 경험으로 깊이 뿌리내려서,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이 아무리 좌절스럽고 화가나고 어려울 지라도 “기뻐하라" 고백하며 최후 승리를 믿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주시는 기쁨입니다.

2.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인 기쁨은 이해타산에 의한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기쁨은 어떤 때에 생긴다고 믿습니까? 내가 무엇을 얻거나 받음으로 생겨납니다.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좋은 일이 생겼다고 믿을 때 기뻐합니다. 복권당첨. 생각만해도 기쁘시죠? 기쁜게 나쁜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과 다른 기쁨이라는 것, 하나님의 기쁨 보다 훨씬 작고 힘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직장에 취직이 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좋은 휴가를 얻어서 멋진 레져생활 또는 여행을 함으로써 웰빙 기쁨을 누리려는, 소위 말하는 행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받음으로 얻음으로 주어지는 기쁨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것에서 오고, 나누는 것에서 얻어지며, 또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이해타산으로 계산된 기쁨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받은 만큼, 이룬 만큼 얻어지는 기쁨은 내가 잃을 때나 내가 넘어질 때 사라질 기쁨입니다. 그런데 진정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누구이냐? 그 상황에 관계 없이 늘 주어지는 기쁨을 쫓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베품을 통해서, 섬김을 통해서, 그 기쁨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그 기쁨을 얻을 수 있는 통로를 저와 여러분은 몇 개나 가지고 있나요? 아까 말씀드린 책의 저자 리처드포스터는 또 한가지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순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오는 기쁨이 모든 기쁨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말씀을 통해 깨달은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변화되었을 때 또 그것을 간증하고 나눌때 들을 때 찾아오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이전에 알지못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서 앎을 통해 내가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을 더 아는 것보다 큰 기쁨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내 가치관이 바뀌고, 삶의 태도와 습관이 바뀌고, 내 내면의 향기가 달라지고, 내 주변이 달라집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3. 그래서 진정한 기쁨은 감정의 변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훈련에 의해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기쁨을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기쁨은 우연히 또는 내 노력으로 얻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앎을 통해서 내 속에서 끊임없이 우물처럼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끊임없이 충만하게 솟아오르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지속해야 할 훈련입니다. 요즘 교회 안이나 밖이나 많은 청년들이 우울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결혼과 취업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그 두가지를 성취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과 긴장감 때문에 나이 30의 고비에서 심각한 내면의 혼란과 무기력증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내면의 짐을 지고 교회온 청년들에게 봉사하라고 하니까 더 상처받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바꾸고 조정해야겠다고 주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제가 섬기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저의 가장 우선된 임무라는 것입니다. 꼭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터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 베품의 기쁨, 무조건 적인 기쁨, 지속되는 기쁨을 그들 삶의 영성화하여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기쁨이 없으면 사역도 훈련도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기쁨이요? “나"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입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이 우리 삶에 늘 충만하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쫓기고 두려워하는 시편기자가 어디에서 기쁨을 발견했습니까? 3절에 보니까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따르는 공동체와 사람들을 통해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그가 불의에 쫓기는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 있었지만, 함께 주님을 따르고 의를 좇는 사람들의 기쁨의 힘을 보고 그 기쁨의 근원을 다시 상기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4절에서 진정한 제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주님에 대한 예배를 떠올리며 그 기쁨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요? 5절에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다.” 지금 쫓기고 다 잃고 억울하게 처한 모든 것 가운데서도 이제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의 잃어버린 산업과 없어진 소득이 기쁨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나의 기쁨이 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7절).”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세상의 기쁨을 생각했던 자신을 훈계하셨다고 도리어 상황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기쁨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생에 대하여 우리가 죽는 날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썩어질 한시적 기쁨이 아니라 진정한 주님의 기쁨을 찾아 나서야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을 지속적으로 일으켜주고 죽는 날에도 웃게 할 수 있는 그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루 하루 매일마다 그 기쁨의 열매, 기쁨의 우물을 파는 내면 연습과 훈련을 지금부터 해야하겠지요?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더 아는 모든 것이 기쁨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쌓여져 나갈 때 세상의 어떤 슬픔도 꺾을 수 없는 깊은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중심 가운데 뿌리내려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