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28, 2014

[설교] 응답에 응답하는 기도

응답에 응답하는 기도
사무엘상 1:27-2:7
2014년 3월 28일 금요새벽설교


‘한나의 기도'는 잘 아시는대로 성경의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도, 특히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마다 신앙의 위인들이나 영적 거인들의 기도나 그들의 기도 생활을 떠올리게 되기도 합니다만, 그보다 더 원초적으로 우리 한국 성도들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기도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자식을 위해 또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현대의 이성적으로 신학적으로 기복신앙이다 잘못된 신앙이다 판단한다 한들, 자기 삶 속의 애환은 모두 가슴에 묻어두면서도, 오로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한국 교회와 우리 세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목사님들이 잘나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교회마다 가득차서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겠어요? 한나의 기도를 따라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한국 교회를 세운 것이라고 말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이 요즘 같이 한국이며 이 곳 이민 사회며, 교회가 도전받고 힘들다는 이 시대에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유산인 어머니의 기도, 한나의 기도를 다시금 재해석하고, 확인하고 회복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나의 기도에 관한 오늘의 본문을 단순하게 정리한다면 첫번째는 기도해야할 상황이 나타나고, 둘째는 상황을 붙들고 기도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기억하시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단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무엘상에 관해 주석을 쓴 월터부루그먼이라는 구약학자는 이 네가지 단계 모두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월터 부루그먼, 사무엘상,하, 인터프리테이션 주석 시리즈



첫번째, 기도해야할 상황이 나타납니다. 1장 5-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영어번역은 원문 그대로 표현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자궁을 닫으셨다.”라고 기록합니다. 두번째로, 한나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제사장 엘리가 한나에게 확증을 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기도해서 구한 것을 주실 이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번째로 19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 영어 번역으로는 여호와께서 그녀를 기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한나의 기도를 듣고 기억하신 분이 또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침내 27절에서 한나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한 것을 허락하셨다/응답하셨다.’ 기도의 원인부터 결과까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주체라고 본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이 한나로 하여금 불행하게 하셨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한나로 임신치 못하게 하셨다는 그 구절만 보았을 때는 그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한나의 기도의 모든 과정 가운데 그 중심되는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본문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 말씀이 전하려고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든 그 문제의 상황 뿐 아니라 그로 비롯해 기도하게 된 과정들과 응답받게 된 모든 순간까지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임재에 대한 선포이자 고백을 오늘 본문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는 어떤 문제를 놓고 매달려 기도하는 간절함 그 뿐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모든 상황 속에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선포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주님 이 사건 이 문제의 열쇠는 아무개 누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움직여주세요...’ 이와 같은 기도는 한나의 기도의 절반만 본받은 모습입니다. ‘이 문제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 당신께만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시작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여호와께서 한나의 자궁을 닫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도덕성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중심과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해 획기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메세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의 중심되는 초점이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내 모든 기도하는 상황의 중심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고백을 하였을 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관점'의 변화입니다. 이 관점의 변화는 단순히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나에게 일어난 관점의 변화는 한나가 삶 전체를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나서 한나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이 상황을 바꾸어주셨습니다. 한나가 아들을 낳은 것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상황만 바뀐 것이 아니라 한나의 관점이 바뀌고 그의 속사람이 바뀌어버렸습니다. 분명 기도의 시작은 아들이 없어 괄시받던 괴로움 때문에 출발한 기도였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아들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괄시받던 상황을 역전해서 집안에서 인정받고 권력을 되찾는 것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런데 기도응답을 받은 한나의 반응은 무엇이었나요? 한나는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기도했으면 아들이 있어야 문제의 해결이 되는 것이 인간적인 상식인데 한나는 이제 아들이 없어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기도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제는 더이상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관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고백 가운데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하여 기도한바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한나는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그의 평생을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나도 하나님께 뭔가를 드린다는 경제적인 교환 (give and take)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상황만 바꾼 것이 아니라 한나도 바꿨습니다. 아들만이 인생의 해법이라고 믿던 한나는 이제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한나는 깨달았습니다. 2장에서 찬송기도가운데 고백하고 있습니다. ‘풍족하다가도 금새 빈곤해 질 수 있고 불임하다가도 임신하는 가 하면 많은 자녀를 두었다가도 쇠약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상황은 언제고 변화될 수 있고 문제는 끊임없이 나를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인생의 해법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가 드린 것은 아들뿐 아니라 아들의 평생, 즉 그의 전 인생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자신보다 소중했을 아들을 드리는 고백 가운데 한나는 자신의 인생 전부도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내 소유를 바친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살겠다는 고백만이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심지어는 하나님도 소유하고 싶다는,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한나의 기도는 첫번째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 가운데 있다는 고백에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두번째로, 한나의 기도는 상황 뿐 아니라 한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시작과 기도의 끝 사이에 내 속사람이 달라지고 변화되어지는 과정이 있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문제와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던 모습에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옮겼을 때 내가 변화되는 것을 경험해야 진정한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를 경험한 한나는 하나님의 응답에 더 큰 삶의 헌신으로 다시 하나님께 응답하는사람으로 성숙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기도의 초점은 문제와 상황에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한 후,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응답을 또 하시겠습니까?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고 또 헌신으로 그 응답에 응답하는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교통키 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만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실 뿐 아니라 응답하신 것에 대해 우리의 응답을 또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라'라는 보상적인 차원의 응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소유로 살기 원한다는 우리 자신의 주님께 대한 헌신을 기다리고 계신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응답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Friday, March 21, 2014

[설교] 아비멜렉의 잘못 세 가지

아비멜렉의 잘못 세 가지
사사기 9:1-6
2014년 3월 21일 금요새벽설교


사사기에 나오는 많은 사사들의 이야기들 중에 아마도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인물들이 있다면 그것은 기드온과 삼손일 것입니다. 그 둘 중에서도 기드온은 믿음으로 삼백명 밖에 되지 않는 군사로 수많은 미디안의 침략해온 적들을 섬멸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으로 잘 알려져있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기드온은 삼손과 마찬가지로 끝이 좋지 않았던 영웅이었습니다. 어제 묵상했던 본문인 8장에 나오는 대로, 기드온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한 것에는 반대하면서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를 통치하실 것이다라고 만류하였지만, 그 대신 백성들에게 금을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권력 대신 재물을 달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금으로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성에 안치해 두었는데, 성경의 저자는 그것이 기드온의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올무는 기드온의 생전이 아닌 그가 죽고 난 후에 가시가 되어 기드온의 집과 이스라엘 전체를 혼돈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기드온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동족과 가족을 처참하게 죽이는 것으로 인해 그리 된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올무"라고 표현한 것이 어찌나 정확한 표현인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실감하였씁니다. 올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쉽게 말하면 덫입니다. 잘 피하면 문제 없이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걸려들면 발목을 잡히게 되는 것이 올무입니다. 기드온의 죄와 교만이 그 집에 올무가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무리 그 올무의 영향권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 올무를 피해 끝까지 빗나가지 않고 사람들과 세상에 죄 짓지 않고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올무 자체가 아비멜렉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이 그 올무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죄를 향해 스스로 선택하여 그 올무를 작동시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처로 인해 죄를 짓거나 잘못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죄를 회개 하기 이전에 올무부터 탓하는 경우를 발견합니다. 심지어는 무속적인 전통에서 나온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 조차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올무같은 환경 속에 둘러싸여 있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믿음의 선택은 늘 있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내 집안에, 또 나라에, 지역에 영적인 흐름과 올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올무에 잡혀 영혼을 잃고 인생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빛을 선택하고 어둠을 버리기로 결단하면 반드시 나에게 그 올무를 피할 길이 주어지는 것이고,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올무를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올무는 발견하고 분별하여 피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영적 미래와 삶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승리하신 주님을 선포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속으로 돌아가 이야기 해보면, 아비멜렉의 그 흉악한 범죄는 그 집안의 올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이 저지른 잘못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그가 저지른 잘못들이 무엇이었는가 생각해 보면서, 이 시대의 사사로서, 주님의 교회에 일군된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비멜렉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아 묵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번째로, 아비멜렉이 저지른 잘못은 외부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목적을 취하려고 한 점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세겜 출신의 여자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외가가 있는 세겜으로 달려가 무리한 협상을 시도합니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70명이 넘는데 이왕이면 세겜 출신인 내가 사사가 되어야 너희에게 유리하지 않겠는냐면서 그들을 회유하여 자금을 얻고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용병으로 고용합니다. 자신의 덕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아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한데 그는 이방 족속과 밀약을 통해 얻은 힘을 가지고 군림하려 시도했습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찾아간 그 첫 발걸음 부터가 그의 순수하지 못한 동기와 방법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에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런 순수하지 못한 방법과 외적인 힘을 동원하여 교회와 사람들 위 자리에 올라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사회 생활 속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 우리는 어떤 방법과 어떤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아비멜렉이 세겜을 찾아 떠난 그 발걸음 처음부터 그는 올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 자신은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로, 아비멜렉의 잘못은 자신의 형제와 동족들을 도륙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자기 형제 70명을 모두 한 자리에서 처형시키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는 흉악한 인물됨을 드러내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선택하신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서기까지 피를 흘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 다윗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친 왕 사울이 그를 7년이 넘도록 쫓아다니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도 그를 떠났고, 모두가 그의 정신이 이상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울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어도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피를 흘리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기다리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또 그가 진정 백성을 섬기려 한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살리고 섬기고자 하는 지도자가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백성을 죽이면 그 같은 위선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비멜렉이 자신의 형제들 뿐 아니라 자신의 외가인 세겜의 모든 사람들을 죄없는 아이들과 여인들까지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절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들의 손에 칼과 창이 없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순전한 동기와 ‘피 흘리는 일이 없게 하겠다,’ 즉, 나로 인해 실족하고 잃어버리는 영혼이 없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겸비할 때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비멜렉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와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채 왕이되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왕이 세워질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는 나라라는 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끊임없는 훈련과 실험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사시대가 바로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우상 숭배와 가나안 이방 문화에 이끌려 방황을 거듭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사사를 통해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다시 이끌기를 반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또 다윗과 같은 사람이 발견되기까지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찾고 또 찾으셨을까요. 사무엘상에서 선지자이자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처음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자신을 진정한 통치자로 알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나라들의 왕들이 누리는 권력과 영화를 탐내 그도 왕이 되고자 원했을 뿐, 하나님의 나라의 운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기름부음을 통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이란 하나님의 구별하심과 인정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내가 원한다고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부어지는 것이 기름부음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원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주셨구나.”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위하여 일을 도모하여 군림하고자 했던 아비멜렉은 기름부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며 따라서 영적 권위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슨 사역 무슨 일들을 감당하던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경험함을 통하여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기름부으셔서 세우시고 그에 합당한 영적 권위가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서 세워졌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과정을 통해서 세워질 때 우리가 하는 일에 진정한 힘과 영향력이 생겨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아비멜렉은 자신의 욕심을 좇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때와 기름부음을 기다리지 않고 인위적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다가 자신 뿐 아니라 온 민족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든 현대이든, 아비멜렉같은 사람들은 많고 다윗과 같은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아비멜렉같은 마음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아비멜렉의 잘못을 묵상하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삶의 순간마다 아비멜렉과 같은 마음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하고 다윗과 같은 마음에 대해서는 YES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 때를 분별하고 그 분의 기름부음을 경험하기 까지 늘 겸비하고 인내하여 훈련과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할 수 있는 정금과 같은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Friday, March 7, 2014

[설교] 뿌리를 내리는 삶

뿌리 내리는 삶
여호수아 5장 10-15절
2014년 3월 7일 금요새벽 설교


성경에서, 특히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에서 계속 등장하는 장소들 가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이고 또다른 하나는  정착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두가지는 성경에서 우리 삶의 두 가지 상황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모티브이기도 하지요.


크게 구원론적인 사관에서 보았을 때 광야는 구원 이전 그리고 약속의 땅은 구원 이후의 삶 또는 천국이라고 나눠 볼 수 있겠습니다만,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았을 때 광야와 정착지 이 두 곳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만나는 두 가지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광야처럼 불확실하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살아가야할 때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과 축복을 매일 경험하는 은혜 넘치는 순간들도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세요?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자라다가 나이 사십이 들어서 광야를 경험하였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가 광야같은 삶을 살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광야를 헤메기를 계속하다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그야말로 광야같은 시대를 살다가 수백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고 나라를 재건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했었나요? 힘든 광야의 연속이었습니까? 가정을 이루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게 되고, 개업을 하였을 때 잠시나마 작은 정착을 경험하셨나요?


이렇듯 삶의 여정 가운데서 반복되는 광야와 정착의 땅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드러납니다. 광야같은 메마르고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시간이 있으면, 또 하나님의 응답과 임재를 경험하는 기쁨이 넘치는 시간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 속 “광야"의 단계에서 “정착"의 단계로 넘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의 여정은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힘든 시기를 지나가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그것은 그저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신뢰하고 걸어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고, 마음이 이상하게 메말라지고, 외부적인 상황들이 어려워질 때, 다시 말해 광야훈련이 내게 찾아왔을 때 내게 필요한 것은 단순하게 주님을 신뢰하고 버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매일 걸어가다 보면 광야는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광야에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광야는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있으면 반드시 우리가 들어갈 약속의 땅도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광야가 얼마나 길 것인가 인데요? 그것은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광야를 통과하는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되었다고 하시면 끝난 것이고 더 가야한다고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굉장히 어렵고 힘들어보일 수 있습니다만 반대로 하나님만 따라서 기다리면 되는 단순하고 복잡한 생각이 불필요한 여정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침이면 하나님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구름 기둥 인도를 따라서 그저 걸어나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광야의 여정이 더 어린아이처럼 그저 주어지는 대로 따라나가면 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들이 군대가 그렇게 힘들다고 해도, 군대에선 주어지는 스케쥴 대로 따라 살기만 하면 시간이 흘러 갑니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니까 힘든 훈련도 없고 괴롭히는 상관도 없는데 살기가 더 어렵고 도전이 많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중요한 시기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가져올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요단강 이편에 살 때는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광야의 은혜를 경험하며 매일 단순하게 따라 살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저편으로 넘어오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삶의 요소요소들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저 돌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정착해야 하는 삶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개인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그런 결단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으며 하루 하루 따라나서는 삶의 단계에서 이제는 내가 정착하여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 공동체에 뿌리 내려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굳건히 서야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변화가 비슷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절 말씀에,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무엇이 그쳤다고 말씀하였나요? 네 “만나"가 그쳤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은혜로 내리시는 기적의 음식이 그쳤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니 그럼 하나님께서 더이상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나가 그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뿌리내리고 정착한 백성은 그 땅의 소산을 땀흘려 일구어내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 것입니다. 만나가 그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쳤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나가 그침으로 인해 정착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만나만 먹고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광야 사막에서 역사에 기억도 남지 않고 다 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는 끝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는 모든 사람은 늘 정착할 준비를 하여야합니다.


땅에 정착하고 뿌리내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같은 기적같은 체험이 더 보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같은 기도에도 척척 응답을 주시던 광야에서의 생활과 다르게 이제는 하나님께서 도전도 주시고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나를 더 성숙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곳이 가나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정착하는 삶"에 필요한 것은 바로 훈련과 결단입니다.


식물이 모종일 때는 그냥 두어도 자라지요. 그런데 땅에 심기우고 나서 살아남으려면 그 여린 뿌리의 순을 땅밑으로 깊이 내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뿌리 깊은 나무로 굳건히 서나가는 것입니다. 처음 심을 때는 농부가 물도 주고 비료도 주지만, 결국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땅밑의 수원까지 뿌리를 내려 그 근원을 만나야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같은 인생여정 속에서 하나님 은혜를 만나서 예수님 믿고 구원 확신 가지고 살면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정착하고 뿌리내려야 비로소 열매맺는 나무같은 신자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은혜의 지하수까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필요한데요. 그것이 바로 말씀 묵상과 기도 훈련, 공동체와 사역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 입니다. 외적 은혜에만 만족하는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이나 부흥회 기간에는 막 뜨겁고 은혜 넘치다가 끝나면 주저 앉는 그런 목장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은혜를 통해 하나된 공동체안에서 내가 이제는 주님의 소명을 듣고 뿌리를 내리고 굳게 서서 성숙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역자로 선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주신 교회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향성을 가지고 행동하며 만나가 아닌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적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은혜에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내가 스스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또 사역하면서 주어지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성숙함에 이르기까지 나아가라고 도전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네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광야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만나가 매일 쏟아지니까 누가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그들이 서있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과 은혜가 주어지는 광야만 거룩한 곳이 아니라 지금 여호수아가 서서 뿌리내리려는 그 땅이 거룩한 땅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나가 내리지 않아고 그 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다만 그 은혜를 누리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광야에 거하며 하나님을 만날 줄 알았다면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뿌리내리십시요. 교회에, 목장에, 말씀에, 기도에, 사역에 뿌리내리고 굳건하게 서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뿌리내림을 통해 스스로 주님안에 채워질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