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7, 2014

[설교] 바울의 은혜에 참여한 사람


빌립보서 1장 3-7절
2014년 12월 8일 새벽 예배

빌립보서를 많은 사람들이 기쁨 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도 그럴 법한 것이, 짧은 4장의 서신서 안에 기쁨을 뜻하는 joy라는 단어가 6번, 동사로서 기뻐하라는 뜻의 rejoice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의 거장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그의 빌립보서 강해설교에서 바울이 선포한 것이 “상상을 초월한 기쁨”이라고 칭하며 그 기쁨의 비밀을 발견하라고 독자들을 도전합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단순히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환경과 상황도 뛰어넘는 세상이 억누를 수 없는, 소위 “상상을 초월 한 기쁨”을 빌립보 교인들도 가져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기뻐하세요 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 능력이 있는 도전이란 무엇일까요? “내 안에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도 이 기쁨을 누리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지라고 말하는 것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옥에 갖힌 바울이 자신의 기쁨을 당신들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옥 안에 있는 사람이 옥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자신을 걱정하는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말이 아니죠. 바울은 자신의 내면안에 있는 거대한 기쁨을 빌립보 교인들이 보고 배우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1장 말씀을 보니까, 그런 바울에게 가장 큰 기쁨의 요인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었고, 따뜻하고 안락한 삶도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가 바울로 하여금 넘치는 기쁨으로 간구하는 삶을 옥 안에서 조차 살게 하였는데 그 두가지는, 첫번째로,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5절 말씀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은 자신의 영적 제자들, 자신이 전도한 영혼들이 복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두 번째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7절 마지막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과 함께 은혜에 참여하였다고 말하며 그것이 또한 바울에게 큰 기쁨의 기도 제목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감옥 조차 파괴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쁨을 그 속에 누렸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기쁨의 원인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영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 제목은 하나도 영혼이고 둘째도 영혼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쁨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과연 지난 한 주간 동안 무엇 때문에 기뻐하셨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 때문에 기뻐하고 영혼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 예수 믿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람입니다.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람. 한 사람을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 영혼을 위한 기쁨과 눈물을 경험해보지 않고 이 생을 살다가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기쁨과 눈물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의 핵심입니다. 천국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그토록 바라시던 잃은 양들이 주님께 돌아와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에 모이면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성경 곳곳에서 증거합니다. 왜 기쁨이 넘칠까요?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온 기쁨입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의 기쁨과 같은 기쁨이 천국에는 곳곳에 넘칠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살다 온 예수의 제자들이 그들의 희생과 땀과 수고를 통해 돌아오게 된 영혼들로 인하여 기뻐하며 소리지르며 환호하게 되는 그 감격의 순간이 천국의 축제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을 모르는 사람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물론 받은 구원과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기쁘지만, 그 기쁨의 깊이와 정도에는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요? 가장 깊은 차원의 기쁨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영혼을 위해 기뻐하고 눈물흘린 사람들입니다. 오늘 8절말씀에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때로 눈물이 있고 좌절이 있습니다. 내가 맡은 영혼들이 올바르게 서지 못하고 비뚤어진 길을 가고자 할 때 화가 나고 힘이 빠지고 하루를 힘있게 살 맛이 나질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이 결국엔 기쁨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그 보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님이 맡겨주시고 보내주신 영혼들 중 하나라도 그들이 믿음을 지켜 구원 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맛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다른 기쁨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 기쁨이 그만큼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 영혼을 얻기 위해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많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 중의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구체적으로 바울은 그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두 가지 사실에 대해 기뻐하였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들이 자신과 함께 은혜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참여”라는 단어가 두가지에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참여라는 것은 어떤 일에 끼어드는 것을 말하지요. 빌립보 교인들이 어떤 것에 끼어든 것입니까? 바울의 복음전도의 열정, 구령의 열정,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 흘리는 삶에 끼어들었습니다. 동참하였습니다. 바울의 그 마음을 자신들도 품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복음 전하는 일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은혜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 후자에 은혜에 참여했다는 말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1단계입니다. 어떤 일이 값지고 귀한 일이라 여겼을 때 참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결정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삶을 내려놓고 목숨의 위협도 내놓으며 참여해야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참여를 비로소 온전케 하는 두번째는 바울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은혜를 오늘 본문의 구절은 이렇게 수식하고 있습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바울이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도, 그의 복음으로 인해 받아야 했던 고난, 즉 매임과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한 수고와 그 복음이 다른 영혼들에게 확정되어 뿌리 내리기 까지의 양육과 섬김의 수고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가지,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은 영혼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혼 사랑 없이 감옥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영혼 사랑없이 복음 전하려고 사람들에게 나가 맞부딫히기 쉽지 않습니다. 복음 확정함을 위해 한 영혼 붙들고 섬기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그 은혜에 바울과 함께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들이 바울의 양육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비로서 바울의 마음을 자신들도 가지게 되었단느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영혼 사랑을 느끼고 이해해서 자신들도 그렇게 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심정을 가장 잘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가 언제세요? 부모가 되었을 때 아닌가요? 스승의 마음을 비로서 알게 된 때가 언제 입니까?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보았을 때 그 스승의 은혜를 알게되지 않습니까? 내가 바울의 위치에 서서 그 복음사역과 은혜에 참여해 보기 전에는 바울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살기 전에는 예수님의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학교나 학생부 아이들이 밤낮으로 사무실에서 방에서 한숨 내쉬며 기도하며 고민하는 전도사님들의 마음을 이해할까요? 아마 대부분은 대학을 가고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루어서도 그 마음을 다 모른체 살아갈 지도 모릅니다. 몰라도 되지요. 그 마음 몰라도 주님 바라보고 잘 사는 모습 보면 그것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청년들이 제가 지고 있는 영적인 짐들을 이해할까요? 무시하지나 않으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졌던 그 기쁨 누려보고 싶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섬긴 사람들이 자신을 비로서 이해하고 복음 전하는 일과 영혼 위한 희생의 길에 동참하게 되었을 때 찾아온 그 기쁨. 그 기쁨이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우리 모든 교인에 이르기까지 다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구령의 열정, 영혼 구원의 무게를 느껴본 사람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려주려고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동역이 되고 하나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가운데 더 친밀하게 알아가야 되겠지요. 그렇지만 진정한 하나됨의 완성은 참여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복음에 참여하고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영혼을 내게 맡겨주셨음을 믿고 바울의 은혜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Thursday, July 10, 2014

[설교] 꺼지지 않는 사랑

꺼지지 않는 사랑
아가 8:6-7
2014년 7월 11일 금요 새벽

성경에서 “사랑"에 관한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근본 속성을 사랑이라고 알고 고백하며 또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은 그만큼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영적 훈련을 통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묵상해야할 근본 가치임이 틀림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랑의 뜻을 설명할 때 그리스어의 어원을 통해 네 가지 종류의 사랑을 많이 이야기 하지요?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 이 네 가지의 ‘사랑'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는데, 아가페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적 사랑이고, 에로스는 연인들 사이의 열정적 사랑, 그리고 필리아는 지혜에 대한 사랑, 또 스토르게는 가족간의 사랑,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 양육되어 필리아에 의해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 완성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여 크세니아, 내가 잘 모르는 사람, 이방인에 대한 친절과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이 이 중 어떤 것에 해당될까요? 성경에서, 특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이 있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이 단지 아가페, 신적 사랑 뿐 아니라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을 다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만나고 경험하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의 모습 속에 동일하게 꾸준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아요?
아가서 말씀은 잘 아시는 것처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솔로몬의 이 여인을 향한 사랑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술람미 여인이 그의 정인을 찾아 다니며 그를 사모하는 마음을 또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왜 이 두 사람의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안에 들어와 있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주석도 하고 추측도 하고 지금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시라는 특성상 모호한 구절구절의 그 시구들의 의미를 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약 39권 안에 아가서를 포함한 이스라엘 학사들의 마음 중심에는 이 두 연인의 관계가 단순한 개인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는 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로 묘사되는 출발점이 바로 이 아가서에 있다는 것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한 줄기로 읽어 나가는 가운데 발견하게 됩니다.

정리하여 보면, 아가서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이야기가 두 남녀의 사랑을 넘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보여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했을 때, 오늘 본문은 특별히 중요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은 술람미 여인이 그의 사모하는 남편에게 하는 말입니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리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가운데, ‘사랑이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자신을 그의 마음과 팔에 도장처럼 품어 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도장이라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인장,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주는 중요한 상징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팔이나 품에 품고 들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분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딜 가든지 운전면허증 들고 다녀야 내가 아무개라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6절 말씀에서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으라"하는 것은 너의 중심에,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그 정체성 속에, 내가 있게하라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모습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져야 할 사랑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인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생명책에 기록하여 붙들고 계십니다. 주님의 마음 속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이 우리 마음 속에 우리의 인장처럼 품어져야 됩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주님이 우리의 인장이 되셔야 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우리 각자의 정체성 속에 주님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 볼 때, 아무개는 어떤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고 등등 우리 자신의 모습을 요약해 주는 어느 정도의 인상이라는 것을 머릿 속에 가지게 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신분증, 다시 말해 삶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정체성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오늘 술람미 여인의 고백 속에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으라.”는 말을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하신다고 생각해요. 주님이 나의 도장같은 존재입니까? 입술로는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실제로 주님이 우리 안에 악세사리나 전혀 입지 않는 옷같은 존재인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6절 말씀은 단호하게 사랑을 정의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불같은 사랑에 대해서는 많이들 언급합니다. 드라마에서 연극에서 노랫말을 통해서 우리는 불같은 사랑에 대해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하는 연인들의 불같은 사랑은 불처럼 한 순간 타올랐다가 또 한 순간 꺼지는 사랑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타오르는 기세만큼 쉽게 사그라드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불같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오늘 술람미 여인이 이야기하는 ‘여호와의’ 불같은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한마디로, 꺼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같은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그같이 열정적으로 (passionate)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영어에서 열정은 passion이라고 하지요. 루이 기글리오라는 분은 이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열정이란 우리가 어떤 것을 위해 감당하기 원하는 어려움의 정도이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고통까지도 견뎌낼만큼 어떤 대상을 원하는 마음이 열정이라는 것입니다. 왜 고통을 견딥니까? 내가 원하는 그 대상이 그만큼 나에게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우승을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을 피땀흘려 훈련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위해 전념하는 많은 선수와 팀을 볼 때, 열정이라는 것은 단순히 화학적 반응에 의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모든 의지와 결단을 불러일으키는 영적 에너지라는 것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 중심의 것으로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위해 살게 만드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열정적 사랑, 여호와의 불과 같은 사랑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절 말씀에 이 열정적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이처럼 꺼지지 않는 사랑이길 바랍니다. 많은 물이나 홍수 조차도 끌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 드리길 원합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께서 이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이기에 가능합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생명으로 우릴 구원하심을 통해 우리도 동일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꺼지게 만드려고 위협하는 요소들이 무엇입니까? 많은 물과 홍수같이 밀려드는 상황과 사람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그 불을 우리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꺼지지 않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인입니다. 모습은 다르고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모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 마음 속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꺼지지 않는 사랑과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사랑과 열정으로 예배하고 섬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시험이 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들고, 오해를 받고, 공격과 상처를 받는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갈만큼 강력하고 뜨거운 사랑이 그들의 심장에 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그 꺼지지 않는 사랑을 다시 회복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랑은 사람이 돈과 재산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은 멸시를 받게될 것이라고 7절 말씀에 기록합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갖고 있을 때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으로 얻고 배울 수 있는 것들만 갖고 있으면 우리가 가진 것들 우리가 훈련하는 것들이 어떤 신성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어요? 크레딧 카드하나만 있으면 악기는 물론이고, 리더쉽, 대학교육, 전문 지식 다 배우고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요즘 시대입니다. 그러나 카드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만이 부어주실 수 있는 사랑과 열정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그 얼굴을 붙드는 사랑과 열정이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변화시키는 그 꺼지지 않는 사랑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그 불을 충만하게 키워나가야 합니다.

많은 찬양곡을 써 영향을 끼쳐온 매트 레드먼이라는 사람은 그의 책에서 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삼요소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불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탈 물질과 산소와 그리고 불이 탈 수 있는 발화점, 즉 온도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열정을 타오르게 할 세 가지는 무엇일까요? 탈 물질 그것은 주님께 드릴 우리의 삶이요, 산소는 불을 살아나게 하는 성령의 임재와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을 당길 수 있는 발화점의 온도는 우리 마음의 결단과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내 안에 주님에 대한 그 열정적 사랑의 회복이 필요하다면, 내 안에 내가 드리지 못한 삶의 부분들을 주님께 회개하며, 성령님을 마음 가운데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산소가 되어 내 심령을 깨우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모할 수 있는 마음을 더 많이 부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물과 홍수가 꺼뜨릴 수 없는 마음의 불을 품고 섬기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 줄 믿습니다.

Thursday, July 3, 2014

[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그의 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그의 말(혀)
잠언 15장 1절 - 14절
2014년 7월 4일


잠언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고 미련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이분법적인 흑백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혼란한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분명한 기준이고,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도 명확하게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말하기 위해 잠언서는 두 가지의 삶의 유형을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대조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잠언서에 들어있는 모든 지혜의 말씀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성령의 영감을 통해 지금의 형태로 정리되고 씌여졌을 당시는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재건했을 때입니다. 오랜 식민지 생활을 겪으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인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혼란과 무지 속에 잘못된 길을 갔을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잠언은 그들이 필요한 것은 “지혜"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지혜는 단순히 어떤 일을 잘 하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시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삶 전체를 두고 말하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내가 부자가 되거나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삶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준으로서의 지혜입니다. 한 때 쓰고 버릴 지혜를 말하는 속담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택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볼 때 잠언서의 지혜는 수단이기 보다는 철학이고, 방법이라기 보다는 신앙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커다란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서가 그 총체적 의미로서의 지혜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분명하고 단순하게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잠언에서 수많은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묶어내는 동일한 주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너무나 당연스레 여기고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반대로 가장 현실 속에서 경험되어지지 않고 있는 잊혀진 영적 원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경외 하는 것과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나님도 잘 믿고 교회 생활을 하지만, 세상에서는 세상 나름대로 살아가야 하는 지혜와 방법이 필요하다는 두 가지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자주 발견됩니다. 성경이 기록되었던 시기에도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이고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제국이 모든 세계의 경제 정치 군사 문화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는 세상에서 나름대로 살아남아야 할 지혜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신앙생활 속에 제한하여 두고 세상에서는 제국의 방법과 논리를 따라 영합해서 살아가는 게 영리하고 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제나 오늘이나 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잠언서가 던지는 단순한 도전이 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잠언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현실의 삶에서 따로 떨어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차원 뿐 아니라 나의 삶, 현실에 뿌리내린 모든 것을 좌우하는 지혜라고 외칩니다. 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따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지요.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담대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 마음 가운데 이 도전이 와서 부딫혀야 정상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살아가는 지혜는 다른 것이라고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이 와서 마음 속에 걸리고 부딫혀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방법이 세상의 방법보다 우선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그 선택이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신문 기사에 칼럼에 소개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지하철 역장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연인즉슨, 자신이 대학시절에  무임승차를 한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고나서 훈련을 받고나니까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던 것 정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성령님께서 계속 회개를 시키시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결단을 하고 자신이 무임승차하면서 내지 않았던 돈의 액수를 계산해서 역장에게 편지를 통해 용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역장은 물론이고 그 기사를 읽은 많으 사람들이 도전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 같지만 그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옳은 선택을 했을 때 세상은 도전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의 결단과 열매들을 통해서 세상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세상에서 하나님이 업신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말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부분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 중심 속에 놓치지 말아햐 할 것은, 지금 이 말씀이 부수적인 지혜라든가 기타 등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나타나야할 실제적인 모습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주제를 붙들고 묵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가지 말씀 가운데서도 오늘 15장에는 유독 “혀"에 관한 “말"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번 다시 정리를 하면, 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지만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지만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아낸다; 3)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 4)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나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다; 5)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긴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경외하지 않는 사람;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면서 그 두 사람의 대조적인 혀의 사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첫째로 유순한 대답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공격이나 비판에도 온유함으로 답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내게 어떤 상처되거나 기분 나쁜 말이나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도 온유함으로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을 더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상처주고 기분 나쁘게 하는 그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온유한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시에 찔리면 ‘아야!’ 하고 소리지르며 반응하듯이 나를 찌르고 간 사람에게 똑같이 돌려주려고 하는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 온유한 반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그 마음에 충만하게 경험되어 작은 상처에 꿈쩍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것은 유약한 것이 아니라 훈련되었다는 말입니다. 훈련하는 사람과 훈련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훈련 안한 사람은 조금만 다쳐도 아프고 죽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훈련으로 다져진 사람은 왠만한 넘어지고 다친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툴툴 털고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온유한 말을 통해 어떤 상처나 상황에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입은 지식을 전파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미련한 사람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아낸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쏟아낸다"는 표현이 참 강렬한 표현입니다. 미련한 사람이 그 입에서 미련한 것을 쏟아낸다는 모습이 참 상상하기 불편한 이미지입니다. 마치 토악질을 해내듯이 미련한 것들을 쏟아내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이 입을 통해 악한 말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입에서 나가는 말들을 잘 관찰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미련한 것이 나가지 않도록, 내 혀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께 주권을 양도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혀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셔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나는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내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만 전달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와야 됩니다. 얼마전에 청년 임원들에게 그렇게 도전했습니다. 청년들 사이에 판단하고 깎아내리는 말들을 모두 멈추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리더들의 입에서 오로지 사람을 세우고 사랑하고 높이는 말만 하라고 했습니다. 누가 목장 모임 안나오고 어디갔다 왔다; 누가 무슨 무슨 말해서 사역 망친다; 누가 누가 문제가 많다; 이런 얘기 당분간 다 멈추하고 했습니다. 사역이 자리를 잡고 기초가 단단히 세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입니다. 저부터 부정적인 말 다 멈추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내 판단을 유보하고 그 분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드리기 원하는 것이죠. 지혜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고 합니다. 우리가 전해야할 진짜 지식은 경제 지식도 아니고 이민 생활 정보도 아니고 오직 선히 베풀어야할 지식은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 속에 주님을 향한 마음이 비춰지게 해주십시요. 기도하게 됩니다. 시편 19편에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제까지의 내 말이 내 생각과 내 얼굴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에 불과했다면, 이후로는 내 말은 오직 주님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절대 어떤 고상한 어려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믿음으로 결단하고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어떻게 살아? 그게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인간적 자아의 교만을 내려놓고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지혜로운 삶, 성공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 잠언이 담대하게 내놓는 약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사람의 그 온순한 혀는 생명나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생명나무는 말 그대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나무입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환상 가운데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데 그것을 통해 나무들이 자라고 생명이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생명나무란 생명을 주고 소생하게 하고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혀가 그런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말을 통해 영적으로 상처입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소생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창하게 지식을 갖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내가 내 혀를 주님께 생명나무 되게 해달라고 내어 드리기로 결단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온순한 혀는 내가 스스로 나서서 뭔가 말해보려는 혀가 아닙니다. 온순한 혀는 주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겸손하게 신뢰함으로 기다릴 수 있는 혀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혀는 온순한 혀입니까 아니면 강팍하고 단단한 혀입니까? 아니면 온갖 스스로 지어낸 지식과 말들로 가득찬 더러운 혀입니까? 아니면 상처주는 가시 돋힌 혀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온순한 혀를 구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나의 혀를 주님께 드립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입술에 숯을 대었던 것 처럼 나의 입을 주님께 드립니다. 정케 하시고 온순한 혀로 만들어 주세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마음만 전달될 수 있는 혀로 주님 앞에 돌려드립니다. 내가 말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말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대언하는 입술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로 이시간 회복해주세요. 기도하기 원합니다. 상처주고 비판하고 깎아내리고 죽이는 혀가 아니라 살리고 회복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혀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입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주인되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Monday, June 23, 2014

[설교] 기도의 시작

기도는 언어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시편 85편 9절-13절
2014-06-20 금요 새벽


시편을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을 잘 묵상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배우셨나요? 처음 예수 믿고 교회 나올 때 참 두려운 것 중 하나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많은 새신자 분들이 말씀하시는 거룩한 고민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기도를 하는가? 인격적이신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주님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참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기도의 언어'라는 것을 찾게 될 때가 있지 않아요? 내 마음 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내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사람의 생각과 뜻이 언어와 참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언어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어떤 언어를 통해서 내 눈이 번쩍 뜨이고 생각이 바뀌고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언어, 이 ‘말'이라는 것이 참 권세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언어로 주님께 기도하지만, 때로는 기도의 언어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방언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상 쓰는 언어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처한 상황과 내 마음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정확하게 과녁을 통과하는 화살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기도의 언어가 우리 안에 던져졌을 때, 그 기도가 내 삶을 바꾸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어진 적절한 기도의 말한마디 단어 하나는 우리의 닫혀있던 마음을 열어주기도 하고, 눈을 열어서 주님을 보게 해주고, 내 시선을 문제에서 돌이켜 하나님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능력있는 기도를 하기 원하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누가복음 11장에서 제자들도 예수님께 똑같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가르쳐주십시요. 참된 기도가 어디에서 시작이 될까요? 저는 우리가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주님 제 안에 기도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제 마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해 저조차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기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성령님, 제가 지금 기도 가운데 무슨 말을 하길 원하시나요?’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신자 분들이 기도할 줄 모르겠다는 그 고백이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기도에 익숙하다보니까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야 되는지 다 알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끊임없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늘 하는 기도, 내가 늘 간구하는 말들, 그 한계를 벗어나길 원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시편이 좋은 교과서가 됩니다. 수많은 기도들을 접하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내가 몰랐던 기도의 언어들을 발굴하게 됩니다. 그 기도를 읽고 묵상하면서 내 기도의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가 그가 처한 상황 속에서 찾았던 주님의 모습과 그가 주님께 드렸던 그 말들을 통해서 오늘 나는 어떤 기도의 고백과 말들을 주님 앞에 드릴 것인가 기대감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시편보다 못하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내 기도의 고백과 언어가 또하나의 시편이 될 수 있습니다. 꼭 장황한 문체나 한글 성경의 독특한 고어체로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끊임없이 하나님의 속성을 붙들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해나가며 세상을 해석하려는 그 오리지널함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시편만큼 우리 기도도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시면서 기도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85편 말씀의 키워드는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자체 속에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미 여러분이 읽으면서 느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고백하면서 앞으로 찾아올 새로운 회복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모든 회복의 첫걸음이자 시작입니다. 소망이 없이 시작되는 회복은 없습니다. 회복에 대한 소망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소망의 결과로 회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광복을 염원하기를 수십년을 계속했습니다. 시인 이상화씨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물으면서 꺼져가는 등불같은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광복을 염원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광복이 찾아 왔습니다. 그 꺼지지 않은 염원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운이 계속 이어져서 이후의 숱한 어려움이 찾아왔음에도 그것을 계속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요즘 잘 아시는 정치인 장로님께서 일제 식민 강점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말들이 많지요… 일제의 강제 점령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악 (evil)”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을 ‘선’으로 바꾼 것이 우리 민족들이 지녔던 끈질긴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잔인한 폭력과 압제 속에서도 사그러들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 소망과 신앙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현재라는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회복이 있기 전에 회복에 대한 소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언제 시작되는가? 누군가가 그 소망에 대해 말하고 외치고 선포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1절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힌트를 주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시편 기자는 지금 그 기나긴 포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그 순간에 이 시편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오랜 고난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발걸음이 처음부터 밝고 희망찬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과 나라와 성전과 모든 것을 이미 다 잃었습니다. 포로기 이전에 비해 돌아오는 백성들의 수는 아주 작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옛 영광과 민족의 정체성은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고, 이제 다시 나라를 세운다고 해도 성공할지 얼마나 갈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좌절의 분위기가 깊이 스며드는 그 상황에서 시편기자의 기도가 그들 안에 부재하였던 언어를 가져옵니다. 바로 소망의 언어입니다. 7절까지 지난 죄에 대해 또 용서에 대해 고백하면서 주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8절부터 시편 기자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올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하실 말씀을 듣겠다고 한 것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포로기 이전에 포로기 동안에 들었던 예언의 말씀은 그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왔다는 절망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제 하실 말씀을 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9절 말씀에 “진실로" 주의 구원이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땅쳐다보고 있을 때 ‘주님을 바라봅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불평하고 상황 탓하고 있을 때 ‘주님의 영광’에 대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프란시스의 기도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거에요. “주님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하소서.” 이 기도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은 바로 전환입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다툼에서 용서로, 분열에서 일치로, 반대되는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중보기도가들은 ‘반대정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반대정신으로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속한 상황에 미움이 많으면 그 반대의 정신인 사랑을 구하는 기도, 사랑에 대한 기도와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곳에 슬픔이 깊이 드리워 있다면 내 기도는 그들과 함께 슬퍼하면서 영원한 기쁨을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겠죠. 우리 기도가 깨어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면, 남들이 다 하는 기도, 당연한 기도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나와 내 주변사람들이 바라보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말씀을, 마치 어둔 방에서 촛불을 하나 딱 켜는 것처럼, 전환을 가져오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내가 구하는 것에서 이뤄지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탄식함으로 간구하심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통해 성령께서 간구하고 계시는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라고 선포하며 소망을 이야기하는 시편 기자가 과연 헛된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그 소망이 인간적인, 그저 사람들을 북돋기 위한 값싼 발언이었을까요? 하나님으로 부터 온 소망은 인간적인 격려와 헛된 약속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 있지 않아요? 화평 (8절)케 하러 오신이가 누구이시죠? 우리 안에 머물게 된 하나님의 영광(9절)이 누구입니까? 인애와 진리와 의와 화평이 모두 함께 만나고 의가 나타나 그 앞길을 닦은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소망을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어떤 기도를 할 것인가? 지금 내가 속한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관점을 불러오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마치면서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어졌습니다. 주님 나의 기도가 자라게 해주십시요. 내 속에 진정한 기도의 언어가 없습니다. 내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를 내게 주십시요.

저와 여러분의 기도자리 가운데 성령님의 공급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겸손과 인정입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요라는 제자들의 단순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서 드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Monday, June 9, 2014

[설교] 기쁨에 대하여


기쁨에 대하여
시편 16편
2014-06-10 새벽 설교

우리 교회에서 훈련교재로 사용하는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에서 단연 가장 잘 씌여진 이 책의 정수(essence)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마지막 단원인 “기뻐하는 훈련"이라는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 마지막 장의 시작을 이렇게 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의 핵심은 기쁨이다.” 이 말을 순간적으로 들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맞는 말인것 같으신가요?



예 맞는 말입니다. 기쁨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단순한 믿음생활의 결과 중의 하나인 것이 아니라 믿음 생활의 핵심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의 잘 알려진 고백도 같은 선상의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말하노니 기뻐하라.” 오늘 시편 16편 말씀도 기쁨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니까, 지금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은 뭔가에 쫓기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시편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좌절과 슬픔이 당연한 그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의 언어는 정반대의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에 “즐거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요. 결말인 9절 부터 11절까지 하나님의 기쁨에 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9절에 “나의 마음이 기쁘고"라고 고백하며, 마지막 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마지막절이 참 재미있는 구절이지요.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주의 왼쪽에는 뭐가 있을까요? 이 구절은 방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 많은 구절들은 짝 또는 세구로 함께 묶여져 있습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두 문장씩 세문장씩 반복해서 씀으로써 그 의미를 한층 강화해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구절의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라는 구와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구는 같은 뜻의 두가지 표현입니다. 그 뜻은 그러면 무엇이겠어요? 주님의 보좌는 기쁨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주님 곁에는 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분위기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가까이할 수록 삶에 기쁨이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고 계시는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 수록 분노와 두려움과 수치심이 커져간다? 그러면 그것은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할 증상입니다.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영성이 기쁨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기쁨”이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인식하는 기쁨과 같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또 믿음의 전통 가운데서 “기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취할 수 있는지 우리가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세상의 기쁨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주님의 기쁨”이라는 것의 다른 점을 우리 생각가운데 명확하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첫번째로, 주님의 기쁨은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잠시동안 머물다가 사라지는 기쁨은 감정이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쁨은 한시적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속되는"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필요합니다.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꺼지지 않는 기쁨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이 한시적인 이유는 그것이 기쁨이 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쁨은 슬픔가운데서도 고통가운데서도 꺼지지않고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기쁨을 감정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고통의 재 (ashes) 가운데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내면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웃고 있으면 기쁜 것이고 울고 있으면 슬픈 것이라는 외적인 의미에 갖혀있으면 진정한 의미로서의 기쁨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내가 감정적으로 기쁠 때이든지 슬플 때이든지 나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일어서게 하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나와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모든 것 가운데 승리하셨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기쁨이 내 안에 진정한 경험으로 깊이 뿌리내려서,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이 아무리 좌절스럽고 화가나고 어려울 지라도 “기뻐하라" 고백하며 최후 승리를 믿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주시는 기쁨입니다.

2.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인 기쁨은 이해타산에 의한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기쁨은 어떤 때에 생긴다고 믿습니까? 내가 무엇을 얻거나 받음으로 생겨납니다.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좋은 일이 생겼다고 믿을 때 기뻐합니다. 복권당첨. 생각만해도 기쁘시죠? 기쁜게 나쁜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과 다른 기쁨이라는 것, 하나님의 기쁨 보다 훨씬 작고 힘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직장에 취직이 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좋은 휴가를 얻어서 멋진 레져생활 또는 여행을 함으로써 웰빙 기쁨을 누리려는, 소위 말하는 행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받음으로 얻음으로 주어지는 기쁨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것에서 오고, 나누는 것에서 얻어지며, 또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이해타산으로 계산된 기쁨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받은 만큼, 이룬 만큼 얻어지는 기쁨은 내가 잃을 때나 내가 넘어질 때 사라질 기쁨입니다. 그런데 진정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누구이냐? 그 상황에 관계 없이 늘 주어지는 기쁨을 쫓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베품을 통해서, 섬김을 통해서, 그 기쁨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그 기쁨을 얻을 수 있는 통로를 저와 여러분은 몇 개나 가지고 있나요? 아까 말씀드린 책의 저자 리처드포스터는 또 한가지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순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오는 기쁨이 모든 기쁨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말씀을 통해 깨달은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변화되었을 때 또 그것을 간증하고 나눌때 들을 때 찾아오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이전에 알지못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서 앎을 통해 내가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을 더 아는 것보다 큰 기쁨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내 가치관이 바뀌고, 삶의 태도와 습관이 바뀌고, 내 내면의 향기가 달라지고, 내 주변이 달라집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3. 그래서 진정한 기쁨은 감정의 변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훈련에 의해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기쁨을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기쁨은 우연히 또는 내 노력으로 얻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앎을 통해서 내 속에서 끊임없이 우물처럼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끊임없이 충만하게 솟아오르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지속해야 할 훈련입니다. 요즘 교회 안이나 밖이나 많은 청년들이 우울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결혼과 취업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그 두가지를 성취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과 긴장감 때문에 나이 30의 고비에서 심각한 내면의 혼란과 무기력증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내면의 짐을 지고 교회온 청년들에게 봉사하라고 하니까 더 상처받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바꾸고 조정해야겠다고 주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제가 섬기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저의 가장 우선된 임무라는 것입니다. 꼭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터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 베품의 기쁨, 무조건 적인 기쁨, 지속되는 기쁨을 그들 삶의 영성화하여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기쁨이 없으면 사역도 훈련도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기쁨이요? “나"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입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이 우리 삶에 늘 충만하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쫓기고 두려워하는 시편기자가 어디에서 기쁨을 발견했습니까? 3절에 보니까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따르는 공동체와 사람들을 통해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그가 불의에 쫓기는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 있었지만, 함께 주님을 따르고 의를 좇는 사람들의 기쁨의 힘을 보고 그 기쁨의 근원을 다시 상기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4절에서 진정한 제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주님에 대한 예배를 떠올리며 그 기쁨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요? 5절에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다.” 지금 쫓기고 다 잃고 억울하게 처한 모든 것 가운데서도 이제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의 잃어버린 산업과 없어진 소득이 기쁨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나의 기쁨이 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7절).”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세상의 기쁨을 생각했던 자신을 훈계하셨다고 도리어 상황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기쁨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생에 대하여 우리가 죽는 날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썩어질 한시적 기쁨이 아니라 진정한 주님의 기쁨을 찾아 나서야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을 지속적으로 일으켜주고 죽는 날에도 웃게 할 수 있는 그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루 하루 매일마다 그 기쁨의 열매, 기쁨의 우물을 파는 내면 연습과 훈련을 지금부터 해야하겠지요?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더 아는 모든 것이 기쁨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쌓여져 나갈 때 세상의 어떤 슬픔도 꺾을 수 없는 깊은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중심 가운데 뿌리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Friday, April 11, 2014

[설교] 선히 여기시는 대로


진정한 회개의 마음: 선히 여기시는 대로...
사무엘하 15:25-30
2014년 4월 11일 금요새벽설교

오늘 묵상 교재의 본문인 사무엘하 13장에서 15장까지의 이야기는 다윗이 밧세바를 탐하여 저지른 일련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윗 가문에 미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암논이 이복동생 다말을 겁간한 사건으로 인해 다윗의 가문 안에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칼이 네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나단 선지자의 선고대로 그렇게 시작된 다윗 집안의 재난은 이어서 결국 압살롬이 헤브론을 거점으로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반역을 일으키는 것으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사건이 하나 하나 전개 되어 나갈 때마다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철저히 자신의 죄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눈 앞에 보면서 상황이 자신의 집안을 넘어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지경으로 악화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로부터 죄를 사함받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죄가 남긴 결과로 인해 일어난 깨어짐들을 바라보며 아파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다윗의 아파함이 어떤 아파함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일련의 사건들과 문제들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정치적 위기를 불러올만한 상황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긴급히 나서서 해결하고 조치를 취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해결방법을 모색하며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소리지를 법도 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속에 드러나는 다윗의 모습은 너무나 수동적입니다.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일어나는 상황들 앞에 마치 손을 놓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오히려 그의 신하 요압이 나서서 일을 해결해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14:1-21). 다윗의 아파함이 어떤 것이었기에 그가 이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이야기의 배경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일까?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 다윗은 지금 좌절속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무력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금 이 모든 일들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것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인간적인 해결 방법이나 노력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다윗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한 그는 하나님께 어떤 데꾸도 없이, 또 인간적인 노력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시도도 없이 그 모든 죄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긍휼이 다시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는 다윗은 단순히 그 상황을 모면케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 진정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다시 찾아오기만을 침묵으로 고통속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과 자신의 집안, 그리고 나아가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을 지나면서 이제 고난주간을 바로 며칠 앞두고 있는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의 태도란 어떤 것인가? 다윗의 상황 속에 제 자신을 대입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 제가 다윗이었다면 이렇게 기도했을 것 같아요. ‘하나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정말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설테니 제발 이 상황이 해결되게 해주십시요.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제가 정말 제대로 살겠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고백은 회개가 아니라는 것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회개가 아니라 위기의 모면을 바라는 기도인 것이지요. 참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보다는 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기도인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지금 칼바람이 부는 가문의 위기와 재난이 근본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떠난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근본문제임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윗은 무엇을 해야했을까요? 정답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죄인인 그가 스스로를 중재하고 중보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할 말이 없다는 옛말이 있지요. 정말 맞는 말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나아가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대한 범죄를 지은 사람이 재판정에 섰을 때 두가지 다른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경우는 ‘자신은 죄가 없다,’ ‘억울하다,’ 또는 정상참작을 요구하거나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입니다. 대개 그런 경우는 정말 무죄하거나 억울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지 않는 사람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의 심각성에 대해 깨닫고 있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누구를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과 앞에 스스로 무너져 고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심판정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각한 죄의 무게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항복으로 침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긍휼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다윗이 보여주고 있는 회개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는 다음 세대 기독교의 가장 큰 위기는 "회개 없는 죄 용서, 거듭남 없는 구원, 성령 없는 교회, 지옥 없는 천국"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 중에서 “회개 없는 죄 용서"라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개 없는 죄 용서란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책망과 확증 (conviction)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안에 죄가 세상의 악과 불의에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지, 내 죄의 무게와 그것이 가져온 또 가져올수 있는 결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면, 내가 정말 그 앞에 애통해하지 않고 그 회개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얼마전에 세례 교육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세례는 내가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지요. 물 속에 들어가는 과정이 없이는 나오는 과정도 없습니다. 물 속에 깊이 내려가 내 죄의 무게를 경험하고 내가 죽는 것을 경험할 때 예수님의 손길이 나를 붙잡아 다시 물 밖으로 나를 일으키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형의 선고를 받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우리가 예수님의 중보와 대속으로 살아나게 된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회개의 과정은 우리가 그 심판대 앞에서 침묵하고 애통하며 긍휼을 기다리는 단계입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자신의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는 가운데 다윗은 자신을 따라온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성으로 돌려보냅니다.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참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상징입니다. 언약궤는 몇만의 군사보다 더 큰 힘이자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민심이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 또한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인간적인 술수와 정치적 해결방법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항복의 손을 들고 있는 듯 보입니다. 다윗이 25절에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지금 온전히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돌아서지 않으시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대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마음대로 자신을 처리하셔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온전한 자기 항복과 내려놓음 (self-abandonment)으로 나아가 그 긍휼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엎드린 모습입니다.

이제 고난 주간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갈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에 대해 다시금 묵상하고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예수님이라는 긍휼의 가치를 다시금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회개의 모습이 우리 신앙 안에 뿌리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미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를 가지고 다시 고민하고 붙드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계속 되어가는 성화의 과정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나와 세상의 죄와 악에 대해 진정으로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스스로 무너져서 주님의 긍휼만을 바라보게 되는 그 회개자의 자세를 우리가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자신의 잘못과 죄된 습관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볼 때 관영한 죄와 아픔들을 바라보고 회개할 수 있기 바랍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선한대로 행하셔도 좋습니다. 주님의 종은 여기 이렇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다윗의 마음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회개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참된 회개는 내 죄와 그로 인해 드러난 심각한 결과들을 해결할 분은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앞에 애통의 침묵으로 서는 것입니다. 나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그같은 가난함과 애통함의 마음을 품고 다가오는 한 주를 다윗의 침묵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Friday, March 28, 2014

[설교] 응답에 응답하는 기도

응답에 응답하는 기도
사무엘상 1:27-2:7
2014년 3월 28일 금요새벽설교


‘한나의 기도'는 잘 아시는대로 성경의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도, 특히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마다 신앙의 위인들이나 영적 거인들의 기도나 그들의 기도 생활을 떠올리게 되기도 합니다만, 그보다 더 원초적으로 우리 한국 성도들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기도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자식을 위해 또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현대의 이성적으로 신학적으로 기복신앙이다 잘못된 신앙이다 판단한다 한들, 자기 삶 속의 애환은 모두 가슴에 묻어두면서도, 오로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한국 교회와 우리 세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도 목사님들이 잘나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교회마다 가득차서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겠어요? 한나의 기도를 따라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한국 교회를 세운 것이라고 말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이 요즘 같이 한국이며 이 곳 이민 사회며, 교회가 도전받고 힘들다는 이 시대에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유산인 어머니의 기도, 한나의 기도를 다시금 재해석하고, 확인하고 회복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나의 기도에 관한 오늘의 본문을 단순하게 정리한다면 첫번째는 기도해야할 상황이 나타나고, 둘째는 상황을 붙들고 기도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기억하시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단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무엘상에 관해 주석을 쓴 월터부루그먼이라는 구약학자는 이 네가지 단계 모두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월터 부루그먼, 사무엘상,하, 인터프리테이션 주석 시리즈



첫번째, 기도해야할 상황이 나타납니다. 1장 5-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영어번역은 원문 그대로 표현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자궁을 닫으셨다.”라고 기록합니다. 두번째로, 한나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제사장 엘리가 한나에게 확증을 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기도해서 구한 것을 주실 이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번째로 19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 영어 번역으로는 여호와께서 그녀를 기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한나의 기도를 듣고 기억하신 분이 또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침내 27절에서 한나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한 것을 허락하셨다/응답하셨다.’ 기도의 원인부터 결과까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주체라고 본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이 한나로 하여금 불행하게 하셨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한나로 임신치 못하게 하셨다는 그 구절만 보았을 때는 그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한나의 기도의 모든 과정 가운데 그 중심되는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본문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 말씀이 전하려고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든 그 문제의 상황 뿐 아니라 그로 비롯해 기도하게 된 과정들과 응답받게 된 모든 순간까지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임재에 대한 선포이자 고백을 오늘 본문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는 어떤 문제를 놓고 매달려 기도하는 간절함 그 뿐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모든 상황 속에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선포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주님 이 사건 이 문제의 열쇠는 아무개 누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움직여주세요...’ 이와 같은 기도는 한나의 기도의 절반만 본받은 모습입니다. ‘이 문제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 당신께만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시작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여호와께서 한나의 자궁을 닫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도덕성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중심과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해 획기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메세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의 중심되는 초점이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내 모든 기도하는 상황의 중심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고백을 하였을 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관점'의 변화입니다. 이 관점의 변화는 단순히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나에게 일어난 관점의 변화는 한나가 삶 전체를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나서 한나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이 상황을 바꾸어주셨습니다. 한나가 아들을 낳은 것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상황만 바뀐 것이 아니라 한나의 관점이 바뀌고 그의 속사람이 바뀌어버렸습니다. 분명 기도의 시작은 아들이 없어 괄시받던 괴로움 때문에 출발한 기도였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아들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괄시받던 상황을 역전해서 집안에서 인정받고 권력을 되찾는 것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런데 기도응답을 받은 한나의 반응은 무엇이었나요? 한나는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기도했으면 아들이 있어야 문제의 해결이 되는 것이 인간적인 상식인데 한나는 이제 아들이 없어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기도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제는 더이상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관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고백 가운데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하여 기도한바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한나는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그의 평생을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나도 하나님께 뭔가를 드린다는 경제적인 교환 (give and take)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상황만 바꾼 것이 아니라 한나도 바꿨습니다. 아들만이 인생의 해법이라고 믿던 한나는 이제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한나는 깨달았습니다. 2장에서 찬송기도가운데 고백하고 있습니다. ‘풍족하다가도 금새 빈곤해 질 수 있고 불임하다가도 임신하는 가 하면 많은 자녀를 두었다가도 쇠약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상황은 언제고 변화될 수 있고 문제는 끊임없이 나를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인생의 해법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가 드린 것은 아들뿐 아니라 아들의 평생, 즉 그의 전 인생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자신보다 소중했을 아들을 드리는 고백 가운데 한나는 자신의 인생 전부도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내 소유를 바친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살겠다는 고백만이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심지어는 하나님도 소유하고 싶다는,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한나의 기도는 첫번째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 가운데 있다는 고백에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두번째로, 한나의 기도는 상황 뿐 아니라 한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시작과 기도의 끝 사이에 내 속사람이 달라지고 변화되어지는 과정이 있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문제와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던 모습에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옮겼을 때 내가 변화되는 것을 경험해야 진정한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를 경험한 한나는 하나님의 응답에 더 큰 삶의 헌신으로 다시 하나님께 응답하는사람으로 성숙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기도의 초점은 문제와 상황에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한 후,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응답을 또 하시겠습니까?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고 또 헌신으로 그 응답에 응답하는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교통키 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만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실 뿐 아니라 응답하신 것에 대해 우리의 응답을 또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라'라는 보상적인 차원의 응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소유로 살기 원한다는 우리 자신의 주님께 대한 헌신을 기다리고 계신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응답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Friday, March 21, 2014

[설교] 아비멜렉의 잘못 세 가지

아비멜렉의 잘못 세 가지
사사기 9:1-6
2014년 3월 21일 금요새벽설교


사사기에 나오는 많은 사사들의 이야기들 중에 아마도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인물들이 있다면 그것은 기드온과 삼손일 것입니다. 그 둘 중에서도 기드온은 믿음으로 삼백명 밖에 되지 않는 군사로 수많은 미디안의 침략해온 적들을 섬멸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으로 잘 알려져있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기드온은 삼손과 마찬가지로 끝이 좋지 않았던 영웅이었습니다. 어제 묵상했던 본문인 8장에 나오는 대로, 기드온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한 것에는 반대하면서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를 통치하실 것이다라고 만류하였지만, 그 대신 백성들에게 금을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권력 대신 재물을 달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금으로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성에 안치해 두었는데, 성경의 저자는 그것이 기드온의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올무는 기드온의 생전이 아닌 그가 죽고 난 후에 가시가 되어 기드온의 집과 이스라엘 전체를 혼돈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기드온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동족과 가족을 처참하게 죽이는 것으로 인해 그리 된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올무"라고 표현한 것이 어찌나 정확한 표현인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실감하였씁니다. 올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쉽게 말하면 덫입니다. 잘 피하면 문제 없이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걸려들면 발목을 잡히게 되는 것이 올무입니다. 기드온의 죄와 교만이 그 집에 올무가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무리 그 올무의 영향권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 올무를 피해 끝까지 빗나가지 않고 사람들과 세상에 죄 짓지 않고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올무 자체가 아비멜렉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이 그 올무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죄를 향해 스스로 선택하여 그 올무를 작동시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처로 인해 죄를 짓거나 잘못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죄를 회개 하기 이전에 올무부터 탓하는 경우를 발견합니다. 심지어는 무속적인 전통에서 나온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 조차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올무같은 환경 속에 둘러싸여 있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믿음의 선택은 늘 있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내 집안에, 또 나라에, 지역에 영적인 흐름과 올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올무에 잡혀 영혼을 잃고 인생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빛을 선택하고 어둠을 버리기로 결단하면 반드시 나에게 그 올무를 피할 길이 주어지는 것이고,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올무를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올무는 발견하고 분별하여 피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영적 미래와 삶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승리하신 주님을 선포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속으로 돌아가 이야기 해보면, 아비멜렉의 그 흉악한 범죄는 그 집안의 올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이 저지른 잘못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그가 저지른 잘못들이 무엇이었는가 생각해 보면서, 이 시대의 사사로서, 주님의 교회에 일군된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비멜렉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아 묵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번째로, 아비멜렉이 저지른 잘못은 외부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목적을 취하려고 한 점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세겜 출신의 여자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외가가 있는 세겜으로 달려가 무리한 협상을 시도합니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70명이 넘는데 이왕이면 세겜 출신인 내가 사사가 되어야 너희에게 유리하지 않겠는냐면서 그들을 회유하여 자금을 얻고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용병으로 고용합니다. 자신의 덕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아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한데 그는 이방 족속과 밀약을 통해 얻은 힘을 가지고 군림하려 시도했습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찾아간 그 첫 발걸음 부터가 그의 순수하지 못한 동기와 방법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에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런 순수하지 못한 방법과 외적인 힘을 동원하여 교회와 사람들 위 자리에 올라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사회 생활 속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 우리는 어떤 방법과 어떤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아비멜렉이 세겜을 찾아 떠난 그 발걸음 처음부터 그는 올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 자신은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로, 아비멜렉의 잘못은 자신의 형제와 동족들을 도륙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자기 형제 70명을 모두 한 자리에서 처형시키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는 흉악한 인물됨을 드러내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선택하신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서기까지 피를 흘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 다윗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친 왕 사울이 그를 7년이 넘도록 쫓아다니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도 그를 떠났고, 모두가 그의 정신이 이상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울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어도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피를 흘리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기다리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또 그가 진정 백성을 섬기려 한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살리고 섬기고자 하는 지도자가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백성을 죽이면 그 같은 위선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비멜렉이 자신의 형제들 뿐 아니라 자신의 외가인 세겜의 모든 사람들을 죄없는 아이들과 여인들까지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절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들의 손에 칼과 창이 없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순전한 동기와 ‘피 흘리는 일이 없게 하겠다,’ 즉, 나로 인해 실족하고 잃어버리는 영혼이 없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겸비할 때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비멜렉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와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채 왕이되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왕이 세워질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는 나라라는 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끊임없는 훈련과 실험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사시대가 바로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우상 숭배와 가나안 이방 문화에 이끌려 방황을 거듭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사사를 통해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다시 이끌기를 반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또 다윗과 같은 사람이 발견되기까지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찾고 또 찾으셨을까요. 사무엘상에서 선지자이자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처음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자신을 진정한 통치자로 알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나라들의 왕들이 누리는 권력과 영화를 탐내 그도 왕이 되고자 원했을 뿐, 하나님의 나라의 운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기름부음을 통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이란 하나님의 구별하심과 인정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내가 원한다고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부어지는 것이 기름부음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원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주셨구나.”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위하여 일을 도모하여 군림하고자 했던 아비멜렉은 기름부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며 따라서 영적 권위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슨 사역 무슨 일들을 감당하던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경험함을 통하여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기름부으셔서 세우시고 그에 합당한 영적 권위가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서 세워졌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과정을 통해서 세워질 때 우리가 하는 일에 진정한 힘과 영향력이 생겨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아비멜렉은 자신의 욕심을 좇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때와 기름부음을 기다리지 않고 인위적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다가 자신 뿐 아니라 온 민족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든 현대이든, 아비멜렉같은 사람들은 많고 다윗과 같은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아비멜렉같은 마음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아비멜렉의 잘못을 묵상하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삶의 순간마다 아비멜렉과 같은 마음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하고 다윗과 같은 마음에 대해서는 YES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 때를 분별하고 그 분의 기름부음을 경험하기 까지 늘 겸비하고 인내하여 훈련과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할 수 있는 정금과 같은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Friday, March 7, 2014

[설교] 뿌리를 내리는 삶

뿌리 내리는 삶
여호수아 5장 10-15절
2014년 3월 7일 금요새벽 설교


성경에서, 특히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에서 계속 등장하는 장소들 가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이고 또다른 하나는  정착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두가지는 성경에서 우리 삶의 두 가지 상황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모티브이기도 하지요.


크게 구원론적인 사관에서 보았을 때 광야는 구원 이전 그리고 약속의 땅은 구원 이후의 삶 또는 천국이라고 나눠 볼 수 있겠습니다만,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았을 때 광야와 정착지 이 두 곳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만나는 두 가지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광야처럼 불확실하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살아가야할 때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과 축복을 매일 경험하는 은혜 넘치는 순간들도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세요?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자라다가 나이 사십이 들어서 광야를 경험하였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가 광야같은 삶을 살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광야를 헤메기를 계속하다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그야말로 광야같은 시대를 살다가 수백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고 나라를 재건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했었나요? 힘든 광야의 연속이었습니까? 가정을 이루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게 되고, 개업을 하였을 때 잠시나마 작은 정착을 경험하셨나요?


이렇듯 삶의 여정 가운데서 반복되는 광야와 정착의 땅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드러납니다. 광야같은 메마르고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시간이 있으면, 또 하나님의 응답과 임재를 경험하는 기쁨이 넘치는 시간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 속 “광야"의 단계에서 “정착"의 단계로 넘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의 여정은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힘든 시기를 지나가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그것은 그저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신뢰하고 걸어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고, 마음이 이상하게 메말라지고, 외부적인 상황들이 어려워질 때, 다시 말해 광야훈련이 내게 찾아왔을 때 내게 필요한 것은 단순하게 주님을 신뢰하고 버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매일 걸어가다 보면 광야는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광야에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광야는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있으면 반드시 우리가 들어갈 약속의 땅도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광야가 얼마나 길 것인가 인데요? 그것은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광야를 통과하는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되었다고 하시면 끝난 것이고 더 가야한다고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굉장히 어렵고 힘들어보일 수 있습니다만 반대로 하나님만 따라서 기다리면 되는 단순하고 복잡한 생각이 불필요한 여정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침이면 하나님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구름 기둥 인도를 따라서 그저 걸어나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광야의 여정이 더 어린아이처럼 그저 주어지는 대로 따라나가면 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들이 군대가 그렇게 힘들다고 해도, 군대에선 주어지는 스케쥴 대로 따라 살기만 하면 시간이 흘러 갑니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니까 힘든 훈련도 없고 괴롭히는 상관도 없는데 살기가 더 어렵고 도전이 많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중요한 시기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가져올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요단강 이편에 살 때는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광야의 은혜를 경험하며 매일 단순하게 따라 살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저편으로 넘어오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삶의 요소요소들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저 돌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정착해야 하는 삶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개인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그런 결단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으며 하루 하루 따라나서는 삶의 단계에서 이제는 내가 정착하여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 공동체에 뿌리 내려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굳건히 서야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변화가 비슷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절 말씀에,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무엇이 그쳤다고 말씀하였나요? 네 “만나"가 그쳤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은혜로 내리시는 기적의 음식이 그쳤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니 그럼 하나님께서 더이상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나가 그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뿌리내리고 정착한 백성은 그 땅의 소산을 땀흘려 일구어내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 것입니다. 만나가 그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쳤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나가 그침으로 인해 정착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만나만 먹고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광야 사막에서 역사에 기억도 남지 않고 다 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는 끝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는 모든 사람은 늘 정착할 준비를 하여야합니다.


땅에 정착하고 뿌리내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같은 기적같은 체험이 더 보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같은 기도에도 척척 응답을 주시던 광야에서의 생활과 다르게 이제는 하나님께서 도전도 주시고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나를 더 성숙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곳이 가나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정착하는 삶"에 필요한 것은 바로 훈련과 결단입니다.


식물이 모종일 때는 그냥 두어도 자라지요. 그런데 땅에 심기우고 나서 살아남으려면 그 여린 뿌리의 순을 땅밑으로 깊이 내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뿌리 깊은 나무로 굳건히 서나가는 것입니다. 처음 심을 때는 농부가 물도 주고 비료도 주지만, 결국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땅밑의 수원까지 뿌리를 내려 그 근원을 만나야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같은 인생여정 속에서 하나님 은혜를 만나서 예수님 믿고 구원 확신 가지고 살면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정착하고 뿌리내려야 비로소 열매맺는 나무같은 신자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은혜의 지하수까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필요한데요. 그것이 바로 말씀 묵상과 기도 훈련, 공동체와 사역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 입니다. 외적 은혜에만 만족하는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이나 부흥회 기간에는 막 뜨겁고 은혜 넘치다가 끝나면 주저 앉는 그런 목장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은혜를 통해 하나된 공동체안에서 내가 이제는 주님의 소명을 듣고 뿌리를 내리고 굳게 서서 성숙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역자로 선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주신 교회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향성을 가지고 행동하며 만나가 아닌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적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은혜에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내가 스스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또 사역하면서 주어지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성숙함에 이르기까지 나아가라고 도전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네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광야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만나가 매일 쏟아지니까 누가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그들이 서있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과 은혜가 주어지는 광야만 거룩한 곳이 아니라 지금 여호수아가 서서 뿌리내리려는 그 땅이 거룩한 땅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나가 내리지 않아고 그 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다만 그 은혜를 누리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광야에 거하며 하나님을 만날 줄 알았다면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뿌리내리십시요. 교회에, 목장에, 말씀에, 기도에, 사역에 뿌리내리고 굳건하게 서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뿌리내림을 통해 스스로 주님안에 채워질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