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3-7절
2014년 12월 8일 새벽 예배
빌립보서를 많은 사람들이 기쁨 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도 그럴 법한 것이, 짧은 4장의 서신서 안에 기쁨을 뜻하는 joy라는 단어가 6번, 동사로서 기뻐하라는 뜻의 rejoice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의 거장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그의 빌립보서 강해설교에서 바울이 선포한 것이 “상상을 초월한 기쁨”이라고 칭하며 그 기쁨의 비밀을 발견하라고 독자들을 도전합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단순히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환경과 상황도 뛰어넘는 세상이 억누를 수 없는, 소위 “상상을 초월 한 기쁨”을 빌립보 교인들도 가져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기뻐하세요 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 능력이 있는 도전이란 무엇일까요? “내 안에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도 이 기쁨을 누리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지라고 말하는 것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옥에 갖힌 바울이 자신의 기쁨을 당신들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옥 안에 있는 사람이 옥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자신을 걱정하는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말이 아니죠. 바울은 자신의 내면안에 있는 거대한 기쁨을 빌립보 교인들이 보고 배우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1장 말씀을 보니까, 그런 바울에게 가장 큰 기쁨의 요인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었고, 따뜻하고 안락한 삶도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가 바울로 하여금 넘치는 기쁨으로 간구하는 삶을 옥 안에서 조차 살게 하였는데 그 두가지는, 첫번째로,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5절 말씀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은 자신의 영적 제자들, 자신이 전도한 영혼들이 복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두 번째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7절 마지막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과 함께 은혜에 참여하였다고 말하며 그것이 또한 바울에게 큰 기쁨의 기도 제목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감옥 조차 파괴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쁨을 그 속에 누렸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기쁨의 원인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영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 제목은 하나도 영혼이고 둘째도 영혼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쁨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과연 지난 한 주간 동안 무엇 때문에 기뻐하셨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 때문에 기뻐하고 영혼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 예수 믿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람입니다.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람. 한 사람을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 영혼을 위한 기쁨과 눈물을 경험해보지 않고 이 생을 살다가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기쁨과 눈물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의 핵심입니다. 천국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그토록 바라시던 잃은 양들이 주님께 돌아와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에 모이면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성경 곳곳에서 증거합니다. 왜 기쁨이 넘칠까요?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온 기쁨입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의 기쁨과 같은 기쁨이 천국에는 곳곳에 넘칠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살다 온 예수의 제자들이 그들의 희생과 땀과 수고를 통해 돌아오게 된 영혼들로 인하여 기뻐하며 소리지르며 환호하게 되는 그 감격의 순간이 천국의 축제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을 모르는 사람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물론 받은 구원과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기쁘지만, 그 기쁨의 깊이와 정도에는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요? 가장 깊은 차원의 기쁨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영혼을 위해 기뻐하고 눈물흘린 사람들입니다. 오늘 8절말씀에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때로 눈물이 있고 좌절이 있습니다. 내가 맡은 영혼들이 올바르게 서지 못하고 비뚤어진 길을 가고자 할 때 화가 나고 힘이 빠지고 하루를 힘있게 살 맛이 나질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이 결국엔 기쁨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그 보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님이 맡겨주시고 보내주신 영혼들 중 하나라도 그들이 믿음을 지켜 구원 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맛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다른 기쁨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 기쁨이 그만큼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 영혼을 얻기 위해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많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 중의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구체적으로 바울은 그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두 가지 사실에 대해 기뻐하였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들이 자신과 함께 은혜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참여”라는 단어가 두가지에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참여라는 것은 어떤 일에 끼어드는 것을 말하지요. 빌립보 교인들이 어떤 것에 끼어든 것입니까? 바울의 복음전도의 열정, 구령의 열정,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 흘리는 삶에 끼어들었습니다. 동참하였습니다. 바울의 그 마음을 자신들도 품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복음 전하는 일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은혜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 후자에 은혜에 참여했다는 말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1단계입니다. 어떤 일이 값지고 귀한 일이라 여겼을 때 참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결정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삶을 내려놓고 목숨의 위협도 내놓으며 참여해야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참여를 비로소 온전케 하는 두번째는 바울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은혜를 오늘 본문의 구절은 이렇게 수식하고 있습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바울이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도, 그의 복음으로 인해 받아야 했던 고난, 즉 매임과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한 수고와 그 복음이 다른 영혼들에게 확정되어 뿌리 내리기 까지의 양육과 섬김의 수고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가지,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은 영혼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혼 사랑 없이 감옥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영혼 사랑없이 복음 전하려고 사람들에게 나가 맞부딫히기 쉽지 않습니다. 복음 확정함을 위해 한 영혼 붙들고 섬기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그 은혜에 바울과 함께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들이 바울의 양육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비로서 바울의 마음을 자신들도 가지게 되었단느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영혼 사랑을 느끼고 이해해서 자신들도 그렇게 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심정을 가장 잘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가 언제세요? 부모가 되었을 때 아닌가요? 스승의 마음을 비로서 알게 된 때가 언제 입니까?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보았을 때 그 스승의 은혜를 알게되지 않습니까? 내가 바울의 위치에 서서 그 복음사역과 은혜에 참여해 보기 전에는 바울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살기 전에는 예수님의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학교나 학생부 아이들이 밤낮으로 사무실에서 방에서 한숨 내쉬며 기도하며 고민하는 전도사님들의 마음을 이해할까요? 아마 대부분은 대학을 가고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루어서도 그 마음을 다 모른체 살아갈 지도 모릅니다. 몰라도 되지요. 그 마음 몰라도 주님 바라보고 잘 사는 모습 보면 그것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청년들이 제가 지고 있는 영적인 짐들을 이해할까요? 무시하지나 않으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졌던 그 기쁨 누려보고 싶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섬긴 사람들이 자신을 비로서 이해하고 복음 전하는 일과 영혼 위한 희생의 길에 동참하게 되었을 때 찾아온 그 기쁨. 그 기쁨이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우리 모든 교인에 이르기까지 다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구령의 열정, 영혼 구원의 무게를 느껴본 사람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려주려고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동역이 되고 하나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가운데 더 친밀하게 알아가야 되겠지요. 그렇지만 진정한 하나됨의 완성은 참여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복음에 참여하고 영혼에 대한 기쁨과 눈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영혼을 내게 맡겨주셨음을 믿고 바울의 은혜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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