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11, 2013

행복한 나귀

나귀를 타신 예수님
21: 1-11
2013-10-11 새벽 설교

예전에 오늘 본문의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귀의 입장에서 본 이야기 형식으로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자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여러분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옛날에 한 마리 나귀가 살고 있었습니다. 작고 못생긴 나귀는 다른 말들처럼 멋지게 달리지도 못하고 윤기나는 털을 가진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감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집에서 밭을 갈때나  물건을 나를 때 불려가서 무거운 자루와 멍에를 지고 몇 리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그 나귀의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높여주지도 않는 것에 늘 화가 나있던 나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 와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The Lord)가 쓰시겠다고 합니다.”그러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을 주인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귀를 그 낯선 사람들에게 순순히 건네 주었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나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그런 생각 가운데 나귀는 그 낯선 사람들이 했던 말을 되뇌였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합니다.”주가 누구인가? 새로운 주인인가? 자신을 사기 위해서 돈을 낸 것도 아니고 말한마디로 내어준 것을 보면 틀림없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에 이르자 새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주인이 나귀 등에 오릅니다. 사람을 태워본적이 없는 나귀로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새 주인의 온기가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데 뭔가모르게 따뜻하고 평안한 느낌이 듭니다. 천천히 무리를 따라 걸어내려가니 이윽고 예루살렘 성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수많은 무리가 나와서 자기를 쳐다보면서 환호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발이 아프지 말라고 길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깔아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수 없는 히브리말로 외치면서 온 성이 떠나가도록 환호성을 질러댑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해진 나귀는 신이나서 고개를 쳐들고 사람들의 환호에 응하였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이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생각하면서 고개를 있는 힘껏 쳐드는 순간, 나귀의 뒷통수에 부히는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등뒤에 누가 타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그냥 좋아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 등뒤에 타고 가는 주인의 팔에 뒷통수가 부히고 나서야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 등뒤에 있는 주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고개를 들면 사람들이 그 뒤에 가려진 주인을 보려고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러는 저 나귀가 왜 저러나걱정스레 쳐다보는 시선도 느껴졌습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지요. 사람들의 환호가 내가 아니라 내 등 뒤에 가려진 주님 (lord)을 향한 것이었구나라는 것을요.

여러분은 어떤 나귀가 되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은 오늘 아침이 밝기 전까지 어떤 나귀로 사셨습니까? 예전에 복음성가 중에 행복한 나귀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꿈이 있는 자유 "행복한 나귀" (2002)


그렇습니다. 세상의 욕심과 죄에 묶여있던 나를 예수님이 풀어주시고 나와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셨는데 주님을 등에 업고 섬기는 삶을 살기보다 그 주님 때문에 쏟아지는 환호를 내가 다 받고 싶어서 내 고개를 들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오늘 말씀과 이 찬양가사를 통해서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등에 모시고 사는 나귀일까 아니면 그분이 오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올라서며 거부하는 나귀인가?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군중들은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어떤 나귀였을까요? 그들은 지금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환영하며 높이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 똑같은 군중들이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내가 원하고 기대하던 모습으로 다가오실 때는 찬양과 영광을 다 돌리다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닌 다른 분이실 때 주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것이 죄인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원하는 모습의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만들어놓고 그 형상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기도 한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우리가 원하는 모습만 가지고 계시다면 그래서 그 왜곡된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만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도구로만 존재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아무리 예수님이라 부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높이고 예배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요. 마치 나귀가 자신의 고개 뒤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모른채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하여 기뻐했던 것처럼, 살아계시고 모든 능력과 존귀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 앞에 교만과 착각에 빠져 사는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허리를 숙이고 낮추어야 내 등뒤에 가려진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지요. 내가 스스로 낮추고 내가 중심에서 비켜서지 않으면 예수님이 가리워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하여야 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은 높아지고 나는 낮아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높아지고 나도 덩달아 높아져야한다고 믿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는 내가 높아지면서 예수님도 높아지는 일이 이뤄지는 경우는 보기 힘든 것같습니다. 내가 낮아지지 않으면 예수님이 온전히 드러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내가 종종 예수님이 보여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가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이 나로 인해 가리워지지 않기 위해서, 내 삶 속에 예수님이 온전히 드러나시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낮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오늘 말씀 속에 나귀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나귀가 등에 모신 예수님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첫번째는, 나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자신이 군중의 환호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수요예배 가운데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인간됨과 나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했던 자리에 섰던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조물로서, 또한 죄인 이었으나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으로서 내 위치를 알고 내가 있을 자리와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를 구분할 줄 알아야합니다. 때로는 내가 나서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내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말을 하고 하는 것 가운데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인지 내가 스스로 그리한 것인지 분별하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 생활하는 가운데, 그들안에 문제와 갈등들을 보여주실 때가 있는데요. 그 때마다 제가 기다리지 않고 나서서 다 만나서 일일이 바로잡고자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제가 유유부단 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만, 제 안에 기다리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내가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영역을 내가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의 영역에서 비켜섰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시지요?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낮아지고 그 자리에서 내가 물러서서 믿음으로 겸손으로 기다려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참된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는, 주인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합니다. 나귀가 등 뒤에 계신 분을 깨닫고 볼 줄 알아야, 사람들의 찬송과 환호가 자신이 아니라 등 뒤에 앉으신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내가 경외하고 따라야할 주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내가 그 앞에 낮아지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내 겸손이 진정한 겸손이 됩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조건 낮아지는 것만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겸손은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두렵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만약 나귀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의 모든 환호는 예수님의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정말 쓸 데 없는 엑스트라같은 인생이구나. 나는 그냥 부림받는 동물일 뿐이구나.”잘못된 겸손으로 인해 일어나는 상처입니다. 내가 낮아짐으로 높여드리기 원하는 그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그 사랑의 확신 안에 거할 때에 쓴 뿌리가 없는 겸손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교 2학년 제주도에서 3개월 동안 선교 훈련을 받고 있었을 때입니다. 한 주 한번 시설 청소를 분담하여 하는데 제가 화장실 청소가 걸렸습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낙심하고 있는데 선교사님이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곳에서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하는 형제같은 분은 여기서 제일 성숙한 사람입니다. 축복합니다.”그 말을 듣고 나니까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무너졌던 자존심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신뢰하고 인정해주는 사랑의 격려를 듣고 나니까 같은 일이라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더라고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나를 안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신 가운데 내가 섰을 때에 내가 낮아지는 모습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겸손은 내 가치 (value)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가치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원위치에 돌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겸손의 길을 갈 수 있는 행복한 나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Friday, October 4, 2013

[설교] 세상의 논리와 하나님 나라

세상의 논리와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8 23-34
(교회에서 사용하는 매일 묵상교재 (One Year Bible) 순서에 따라 본문이 정해집니다.)
2013 10 4일 새벽 예배 설교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복음서의 씌인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가에 대해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복음서 읽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당시에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해본 1세기에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말씀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내가 마치 예수님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말씀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복음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또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가 때로는 예수님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 사전지식을 가지고 읽기 때문에, 감사한 일이지만, 또 그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와닿는 충격과 감동이 때로는 덜 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당시 복음서가 처음 씌여져서 사람들에게 읽혀졌을 때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놀랍고 신기해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란 말인가!?”그런 마음 속에서부터의 감탄과 놀라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날 본문을 읽는 우리의 마음도 주목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이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 부분에 집중하면서,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선입견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찾아 내려가며 읽었을 때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익숙한 습관들 속에서 만나지 못했던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학생이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하는 은혜 체험을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눈물로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서 이 학생 안에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겼지요. 그래서 이 학생이 그 날 밤부터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주일학교 시절부터 늘 들고 다녔던 성경인데 말씀 한구절 한구절이 어찌 그렇게 새롭게 와닿는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마음 속에 흥분이 가득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생각해본다면, 마태복음은 유대문화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리기 위해 씌인 복음서이지요. 그래서 이미 구약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기 때문에, 구약의 말씀들과 인물들을 계속해서 인용하고 상기하면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로 오셔서 구약의 말씀과 율법들을 완성하시고 새언약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말씀하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예언된 메시야로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이전의 삶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삶이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역설하기 시작합니다. 2장에서 헤롯왕의 아기를 죽이려는 위협을 통해서 바로의 위협으로 부터 건져내어진 모세의 삶을 대표하고, 3장에서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예언자들의 예언의 성취로서 예수님이 오신 것을 말씀합니다. 4장에 예수님의 광야시험과 40일 금식은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이후 40년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은 것을 대표하는 듯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인생 자체가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하는 사실을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자 하시는데,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지요? 복음서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 세계로서의 천국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미래이자 곧 현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정치적인 배경을 생각했을 때 더 잘 이해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가 일제 시대에 식민지로 있었을 때, ‘내 나라’’우리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겠어요? 그 때 나라라는 말은 일제 식민지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그 억압과 고통으로 부터 벗어난 남의 나라 신민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속한 우리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의 시대적 배경은,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그야말로 포로기와 식민지의 계속되는 연속이었습니다.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또 페르시아로, 그 다음 알렉산더로부터 로마제국까지 몇백년간을 나라 없이 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온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만큼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이 절실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이 생각했던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배척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버려 두었지요.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어떤 위치에 계시고, 또 그가 말씀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과연 세상의 질서, 로마 제국의 질서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긴 서론을 통해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마태복음을 우리가 이제 묵상해 나가면서 두가지에 초첨을 맞추어 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 접하는 마음으로 말씀이 예수님을 나에게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주권아래 사는 삶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겼을 때, 우리 삶에서 신앙적인 정체성이 확실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세상 안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제 자신에게 또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기대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이후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파하시기 위해서 첫번째로 행하신 일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사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분의 기적으로 고치시기 시작합니다.

복음서안의 흐름 속에서, 말씀 선포가 먼저 행해지고 그 다음에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기적과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깨달아졌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분을 믿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고 난 이후에 그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몸소 실천하는 과정으로서 기적과 치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생각할 때 기적과 말씀은 다른 두 가지의 독립된 사역이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치유를 받으려면 치유집회에 가고 말씀을 잘 배우려면 사경회나 강해 설교 예배에 나가야 된다는 무의식이 교회안에 언제부터인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이미 능력이 있고 그 말씀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그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적과 체험은 그 말씀의 선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적과 체험을 말씀에서 떼어서 따로 생각했을 때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적과 체험이 중심이 되어서 정작 복음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인지 혼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오셔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리자를 고치신 그 예수님이 산위에서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적과 치유의 역사를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과 복음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통해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오늘 치유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고치시고 치유하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늘 8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네 번의 치유사역을 행하십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마지막에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치십니다.

첫번째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율법에서도 성결치 못한 병으로 따로 격리하여 성밖으로 내쫓으라고 정하고 있는 병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늘 죄인으로 사회에서 남들에게 보여질 수 없는 존재로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가 두려움으로 물어보지 않습니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하실 수 있나이다.”세상의 의사나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가까이하기조차도원하지않았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이 확신을 주기위해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 대답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라.”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너를 죄인이라고 하고 멀리하고 돌던졌으나 하나님 나라는 너에게도 열려있다 내가 네가 나음받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번째 예수님이 만나신 백부장의 하인은 누구입니까? 백부장은 로마 제국의 군인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빗대어 말하면 일본 순사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 하인 역시 고쳐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 내가 로마인이든 유대인이든, 적군이든 아군이든, 세상적 기준에서 죄인이든 의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음을 받고 치유받을 수 있는 곳, 즉 누구든지 그 마음의 가난함이 있다면 와서 예수님을 만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건없는 누구에게나 새생명을 주고 하나님 나라에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주시고자 하는 그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그 영혼의 구원을 받고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니까 가다라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달라고 촉구했다고 합니다.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은 이미 세상의 경제적 논리를 통해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을에 심하게 귀신들린 두 사람이 나음받은 것을 기뻐하기보다 죽은 돼지 떼를 아까워하면서 예수님이 비슷한 경제적 피해를 자신들에게 또 입히실까 두려워 그를 떠나라고 부탁하기 까지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보다 돈을 중시하고 영혼구원보다 내 안락함과 경제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 풍랑은 잠잠하게 하셨지만, 세상속에서는 영적인 파도를 일으키셨습니다. 세상의 논리, 제국의 논리, 경제적인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마음이 가난한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법칙을 선포하시면서 기득권을 가지고 세상을 돈과 물질의 법으로 다스리려는 사람들의 사회에 풍랑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쓰신 내게 있는 것이라는 책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그 분의 강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어보신 장소가 가이사랴, 즉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라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황제의 동상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도시로서 황제의 주권과 제국의 논리를 대표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곳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어보신 것은 황제와 제국의 힘과 논리 앞에서 너의 신앙은 무엇이냐고 도전하고 계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갈 구원받은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해서 이 세상의 논리를 침노하는 일들이 일어나야하지 않을까요? 어떤 찬양에서 고백하듯이, “세상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라는 기도를 되뇌이면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