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신 예수님
마 21: 1-11
2013-10-11 새벽
설교
예전에 오늘
본문의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귀의 입장에서 본 이야기 형식으로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자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여러분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옛날에 한 마리
나귀가 살고 있었습니다.
작고 못생긴 나귀는 다른 말들처럼 멋지게 달리지도 못하고 윤기나는 털을 가진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감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집에서 밭을 갈때나 물건을 나를 때 불려가서 무거운 자루와 멍에를 지고 몇 리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그 나귀의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높여주지도 않는 것에 늘 화가
나있던 나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 와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 (The Lord)가 쓰시겠다고 합니다.”그러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을 주인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귀를 그 낯선 사람들에게 순순히 건네 주었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나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그런 생각 가운데 나귀는 그 낯선 사람들이 했던
말을 되뇌였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합니다.”주가 누구인가?
새로운 주인인가? 자신을 사기 위해서 돈을 낸 것도 아니고 말한마디로 내어준 것을
보면 틀림없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에 이르자 새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주인이 나귀 등에 오릅니다. 사람을 태워본적이 없는
나귀로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새 주인의 온기가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데 뭔가모르게 따뜻하고
평안한 느낌이 듭니다. 천천히 무리를 따라 걸어내려가니 이윽고 예루살렘 성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수많은 무리가
나와서 자기를 쳐다보면서 환호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발이 아프지 말라고 길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깔아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수 없는 히브리말로 외치면서 온 성이 떠나가도록 환호성을 질러댑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해진
나귀는 신이나서 고개를 쳐들고 사람들의 환호에 응하였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이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생각하면서 고개를 있는 힘껏 쳐드는 순간, 나귀의 뒷통수에 부딫히는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등뒤에 누가 타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그냥 좋아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 등뒤에
타고 가는 주인의 팔에 뒷통수가 부딫히고 나서야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 등뒤에 있는 주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고개를 들면 사람들이 그 뒤에 가려진 주인을 보려고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러는 ‘저 나귀가 왜 저러나’걱정스레 쳐다보는 시선도 느껴졌습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지요. 사람들의 환호가 내가 아니라 내 등 뒤에 가려진 주님 (lord)을 향한 것이었구나라는 것을요.
여러분은 어떤
나귀가 되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은 오늘 아침이 밝기 전까지 어떤 나귀로 사셨습니까? 예전에 복음성가 중에
“행복한 나귀”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 |
| 꿈이 있는 자유 "행복한 나귀" (2002) |
그렇습니다. 세상의 욕심과 죄에
묶여있던 나를 예수님이 풀어주시고 나와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셨는데 주님을 등에 업고 섬기는 삶을 살기보다 그 주님 때문에 쏟아지는 환호를
내가 다 받고 싶어서 내 고개를 들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오늘 말씀과 이 찬양가사를 통해서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등에 모시고 사는 나귀일까 아니면 그분이 오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올라서며 거부하는 나귀인가?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군중들은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어떤 나귀였을까요? 그들은 지금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환영하며 높이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 똑같은 군중들이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내가 원하고 기대하던 모습으로 다가오실 때는 찬양과 영광을 다 돌리다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닌 다른 분이실 때 주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것이 죄인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원하는 모습의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만들어놓고 그 형상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기도 한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우리가 원하는 모습만 가지고 계시다면 그래서 그 왜곡된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만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도구로만 존재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아무리 예수님이라 부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높이고 예배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요.
마치 나귀가 자신의 고개 뒤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모른채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하여 기뻐했던 것처럼,
살아계시고 모든 능력과 존귀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 앞에 교만과 착각에 빠져 사는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허리를 숙이고 낮추어야 내 등뒤에 가려진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지요. 내가 스스로 낮추고
내가 중심에서 비켜서지 않으면 예수님이 가리워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하여야 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은 높아지고
나는 낮아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높아지고 나도 덩달아 높아져야한다고 믿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에는 내가 높아지면서 예수님도 높아지는 일이 이뤄지는 경우는 보기 힘든 것같습니다. 내가 낮아지지 않으면 예수님이 온전히 드러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내가 종종 예수님이 보여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가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이 나로 인해 가리워지지 않기 위해서, 내 삶 속에 예수님이 온전히 드러나시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낮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오늘 말씀 속에
나귀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나귀가 등에 모신 예수님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첫번째는, 나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자신이 군중의 환호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수요예배 가운데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인간됨과 나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했던 자리에 섰던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조물로서, 또한 죄인 이었으나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으로서 내 위치를 알고 내가 있을 자리와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를 구분할 줄 알아야합니다.
때로는 내가 나서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내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말을 하고 하는 것 가운데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인지 내가 스스로 그리한
것인지 분별하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 생활하는 가운데,
그들안에 문제와 갈등들을 보여주실 때가 있는데요. 그 때마다 제가 기다리지
않고 나서서 다 만나서 일일이 바로잡고자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제가 유유부단 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만, 제 안에 기다리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내가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영역을 내가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의 영역에서 비켜섰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시지요?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낮아지고 그 자리에서 내가 물러서서 믿음으로 겸손으로 기다려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참된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는, 주인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합니다. 나귀가 등 뒤에 계신 분을
깨닫고 볼 줄 알아야, 사람들의 찬송과 환호가 자신이 아니라 등 뒤에 앉으신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내가 경외하고 따라야할 주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내가 그 앞에 낮아지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내 겸손이 진정한 겸손이 됩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조건 낮아지는 것만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겸손은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두렵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만약 나귀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의 모든 환호는 예수님의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정말 쓸 데 없는 엑스트라같은 인생이구나.
나는 그냥 부림받는 동물일 뿐이구나.”잘못된 겸손으로 인해 일어나는 상처입니다.
내가 낮아짐으로 높여드리기 원하는 그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그
사랑의 확신 안에 거할 때에 쓴 뿌리가 없는 겸손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교 2학년 때 제주도에서 3개월 동안 선교 훈련을
받고 있었을 때입니다. 한 주 한번 시설 청소를 분담하여 하는데 제가 화장실 청소가 걸렸습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낙심하고 있는데 선교사님이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곳에서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하는 형제같은 분은 여기서 제일 성숙한 사람입니다. 축복합니다.”그 말을 듣고 나니까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무너졌던 자존심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신뢰하고
인정해주는 사랑의 격려를 듣고 나니까 같은 일이라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더라고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나를 안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신 가운데 내가 섰을 때에 내가 낮아지는 모습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겸손은 내 가치 (value)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가치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원위치에 돌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겸손의 길을 갈 수 있는 행복한
나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