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로 부름받은 사람들
2013년 4월 18일 새벽 예배
본문: 행 6:1-7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장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언제나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주는 모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이 그 모델로서의 초대 교회의 모습을 “완벽한” 교회로서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완벽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문제없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완성형”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 교회가 고통
받고 어려움받는 문제들을 초대교회들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인들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가르침을 주는 이유는 그들에게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법과 태도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의 우리
모습과 전혀다른 성숙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도전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완성된 형태의 위대한 교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교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지금 내가 속한 신앙 공동체가 아무리 대단하고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언제든지 쇠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교회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성장하기 위한 필요 조건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장에 따른 문제와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성장하는 교회”를 단순히 우리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순히 교회의 규모나 교세의 확장을 위해 우리가 성장해야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듯이, 이 지역에 모든 교회들이 다같이 성장하는 꿈을 꾸고
기도해야합니다. 우리가 속한 지역 공동체 안에 모든 믿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과 구제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모습들이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숙한 사람들”이 준비되고 세워져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숙한 사람들이 세워진 교회는 문제와 갈등이 없는 교회가 아니라 그 도전들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급격히 성장하고 제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교회는 도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도전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이나 공격이 아니라 바로 내부의 갈등이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니까
제자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지로부터 모여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 순례를 왔다가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어서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헬라문화에 더 익숙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마치 우리 교민사회에서 2세 3세 자녀들이 한국문화와
언어보다는 이 곳의 문화와 언어에 더 익숙해진 것처럼, 헬라문화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 예루살렘 안팎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열두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제자가 된 사람들 중에도 헬라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많아져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서로 다른 두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 익숙하고 아람어를 쓰는 토착 (네이티브) 유대인들과 타지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이 함께 모이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동역”이라는 것은
참으로 힘든 것이지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연합하여 일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혼자 하면 더 쉬운 일들이
많습니다. 동역하려면 왜 힘이 듭니까? 서로 연합하려면 서로를 이해해야하고
대화와 시간을 들여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약점과 강점들을 서로 발견하고
차이를 이해하면서 엄청난 인내의 과정을 거쳐야 팀웤이 형성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팀웤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요? 세상에서도 “동역”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포츠팀이나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
함께 팀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지 아시지요? 우리는 때로 “동역”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은혜로운 자리에 모여서 함께하는 것이니까 그냥 모여서 하면 동역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쉽게 이뤄진 동역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단순한 작업이나 봉사 정도는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고된 동역을 위해서는 많은 기도와 희생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편 133편 말씀에 보면,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형제가 연합하고 동역하는 것이 아름답습니까? 그것이 쉽게 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고 흔하게 만들어 진 것 중에 아름다운 것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보배로운 기름은
귀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요, 헐몬의 이슬이 아름다운 것은 찬밤의 긴 시간을 지나 새벽 미명에 맺히는 요단강의
근원인 헐몬산의 귀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고 여려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가야하는 것이기에 동역은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연합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작은 갈등과 원망을 통한 도전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도전의 연습 과정을 딛고 일어설 때 진정한 성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대함은 완성된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랑의 학교”로써 우리가
배우고 연습하며 성장하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대로 초대
교회도 갈등의 훈련과정을 통과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두 그룹들이 갈등에 빠졌습니다. 기존 교인들인
히브리권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헬라권 교인들에게 전부 음식과 재원을 분배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기존 히브리권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접대를 하자, 구제받지 못하는 헬라권 사람들 사이에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특히 당시 큰 사회 문제였던 과부의 경제적 빈곤을 구제하는 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손길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은 참으로 큰 문제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교회나 사역에 있어서 항상
이같은 도전이 찾아옵니다. 채워야 할 필요는 항상 늘어만 가는데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자원은 늘 제한되어있습니다.
언제나 충분한 상태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언제나 충만한 것으로 채우실 수 있는데 말이죠.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한 가운데 섬기도록 하시는가?’라는 질문 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교회에 넘치도록 재원이
늘어나게 하시고, 커다란 건물도 세워주시고, 부족함없게 해주시면 갈등도 없고 이렇게 힘들게 선교하고 사역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이 쓰시는 사람들과 사역들을 바라 볼 때 부족함 가운데 섬기지 않으시는 분을 본적이 없습니다. 늘 벼랑 끝에 선 마음으로 간구하면서 섬기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과 교회 가운데 부족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분 자신이 부족한 분이어서가 아니지요. 그 부족함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부족함이 더 큰 성숙과 보이지 않는 풍요함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부족함을 통과하면서 더 큰 것을 얻어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지금
초대교회는 어리석은 집단입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 서로 다 공유하고 나눠가지겠다고 합니다.
온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중에는 부유한 사람도 있지만 가난한 과부들과 고아들이 더 많습니다. 그 필요를 어떻게 다 채우겠다는 것입니까? 가진 것은 한정 되어 있는데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섬기겠다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의 물질적 부족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사도들은 좌절하고 넘어졌을 것입니다.
| 벼랑 끝에 서는 용기, 로렌 커닝햄 저 (예수전도단 출판) |
하지만 2절에 보니까 사도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현상적으로 드러난 문제는 물질의 부족함이요 물질을 분배함에 있어서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반응은 그 부족함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
“우리가…” 라고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문제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을 놓고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우리가…”라고 시작하였습니다. 문제의 핵심이 갈등의 중심에 선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고 고백하고 앞장 선 것입니다. “당신”이 해결할 문제라는 생각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자신들 속에서
발견한 문제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순위에서 제쳐졌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잘 해결하는 방법은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는 지금 초대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물질의 부족함입니다.
분배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금과 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한이
없고 언제나 풍성하게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의 현상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기들안에 풍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짐으로써 사도들은 초대 교회가 물질에 의해 정의되는 곳이 아니라
말씀으로 정의 되는 정체성을 갖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결정입니까? 교회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 한 가지 한 가지가 그 교회를 정의내리고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을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결정하고 선포하는 것이 내 교회의 모습이고 내일이고 문화가 됩니다.
그런 사도들의 결정은 모든
제자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문제의 해결이 현상과 환경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사도들이 공적으로 자신들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말씀 앞에 서기로 결단하니까 사람들이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없다고
고백함으로 인해 집사들이 세워졌습니다. 세상의 능력과 기준으로가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아름다운 모습은,
초대 교회 사람들이 추천한 일곱 집사 후보 모두가 다 헬라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름만으로 그들의 소속된 문화를 알 수 없을지라도 일곱 명 대부분은 헬라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에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동의합니다.
지도자들이 눈 앞의 부족함에 주목하지 않고 말씀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함으로 바로서려고 하니까 회중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헬라파 교인들을 구제 사역의 중심에 둠으로써 공정한 분배가 일어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4절 말씀에
사도들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하였던 것은
사도들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서는 모습을 통해 모든 제자들이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지 교회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진정한
연합과 동역은 사도들의 겸손과 올바른 결정을 통해 더욱 견고하여 져서 교회의 왕성한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동역”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기득권을 놓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눈앞의 부족함에 실족하지 않고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에 힘쓰는 사람입니까?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 형제자매요, “동역자”라고 불림받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인지요? 여기 모인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예수님안에서 그 분을 위한 “동역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함께 지어져 가는 과정 가운데
여러가지 부족함과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말씀에 합당한 반응을 하면서 극복해나감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훈련하시고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 혼자만 성장하도록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된 동역자요 지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임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붙들고 나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여러분 한분 한분을 동역자로 기름부으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지길 기도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 (요 15:5,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