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6일 새벽기도 설교
본문: 삼상 6:1-19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청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치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삼아 전쟁에 임했던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 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어제 묵상하셨던 5장과 또 오늘 저희가 함께 보고 있는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 떨어진
자신의 영광을 어떻게 스스로 다시 회복하시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략]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달”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전 장에 일어난 일들을 잘 생각해 보시면, 법궤가 그 수여 달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 아스돗이라는 곳에서 우상 신 다곤의 신전에 보관되었었지요. 신전 안에 법궤가
보관 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이 다곤의 집 안에 포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신전의 주인인 다곤의 신상은 얼굴과 손목이 끊어진채 엎드러지고, 지방내에 독한 종기가 창궐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방 관리들이 아무래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니까, 법궤를 다른 지방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런식으로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7달
동안 블레셋의 도시들을 옮겨 다니면서, 법궤가 가는 곳마다 블레셋 사람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더이상 블레셋 안에서 법궤를 옮겨다니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 방백들은 법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을 다시 돌려보내는 일은 국제 관계에서
매우 드문일입니다. 항복을 하거나, 자국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 도움을
구할 때라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할 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그냥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속건제물을 붙여서 그것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속건제물은 guilty offering, 다시 말해서, 죄를 진 사람이 죄에 대해 자복하고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물을 드린 다는 것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뿐
만이 아니라, 이전 5장에서는 계속해서 블레셋
지도자들은 법궤를 지칭하는 말로, “이스라엘 신의 궤”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요.
오늘 6장에서 그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는, “여호와의 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그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신 중의 하나로 무명신으로
여겼던 그들이 이제는 확실하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그것을 여호와의 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5절말씀에, 블레셋 방백들에게 자문하고
있는 제사장과 복술자들이 제안합니다: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속건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 나온 니느웨 백성들처럼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블레셋은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블레셋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제사장 엘리의 가문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블레셋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 낮추는 모습은 엘리 가문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모습을 더욱 드러나게 합니다.
7절-8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법궤를 옮기기 위해 갓 새끼를 낳은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소 두마리를 수레에 메워 돌려보내라고 제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번째로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소들은 수레를 잘 끌고 갈리가 없습니다. 수레를 운반하는 일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운송의 역할을 하기 어려운 소들이라는 것이죠. 두번 째로 갓 새끼를 낳은 소들이라는
것입니다. 갓 새끼를 낳아서 젖이 나는 소라고 10절에 기록하고 있는데요.
젖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장거리를 움직이기에 몸이 불편한 소들입니다. 더구나 새끼
송아지들을 집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어미 소들이 새끼들에게로 가고자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당연하고 강한 모성본능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방향쪽 보다는 집 쪽으로 갈 확률이 더 높은 소들이라는 것입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이 원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움직일 가능성이
적은 소 둘을 메워서 그 수레가 그래도 이스라엘 쪽으로 향하면, 우리에게 내린 진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인줄
확실히 알겠다’라는 일종의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앞에 두고서 제단에 물을 부은 후에, 제단에 불을 내려서 타오르게 하시는 이가 진정한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모두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의 지혜와 꾀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블레셋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두
암소가 이스라엘의 경계 지역인 벧세메스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울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 대로를 따라 곧장 벧세메스의 골짜기까지 법궤가 든 수레를 끌고 갔습니다.
법궤의
여정을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욕심에
의해서 또 불경건한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에 의해서 성소 바깥으로 나온 법궤는 블레셋 군사들에 의해서 또 지역 군수들을 통해서 이곳 저곳을 전전하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장면에서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데, 말도 못하고 일도 못하는 암소 둘에 의해서 그 법궤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12절에 암소가 대로를
가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율법을 주야로 읽었던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든지 신명기와 여호수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였을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4절에,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우로 벗어나고 있는데 두 암소는 치우치지 않고 대로를 갔다는 것이에요.
집에서
잘 훈련된 강아지나 다른 동물들을 키우시는 분들은, ‘강아지 새끼가 왠만한
사람보다 낫구나.’라는 생각해보신 적 있을것 같습니다. 종종 뉴스를
보면서 나이드신 분들이 ‘저 누구 누구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씀하시기도
있는데요. 오늘 말씀 속에 암소 둘이 바로 그런 풍자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법궤를
맨 암소 둘은 한번 멘 적도 없는 수레를 묵묵하게 끌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자신 앞에 놓여진 대로를 묵묵히 걸어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진짜 소만도 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 두 암소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놓여주신 길을 묵묵하게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 두 암소는 갈바를 알지 못하고도 그 놓여진 길을 소치는 사람의 인도 없이도 치우치지 않고 묵묵하게 걸어갔습니다.
14절에 보니까, 그렇게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언약궤가 처음 실로의 성소로부터 나올 때부터 주욱 있어왔던
문제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잘못을 범하였었는데요. 오늘 법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엄청난 환난을 주고 돌아오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교만한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들 수 있었을 상황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처음 갖고 있던 하나님을 청종하기 보다는 이용하려는 교만해진
마음이 되살아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사용하고자했던 법궤의 목적이었던 블레셋의 심판이 오랜
패배 이후에 이뤄져서 법궤가 블레셋을 심판하고 그들 손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그대로 법궤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손으로 돌아왔다면,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그들의 잘못을 오히려 정당화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을 것입니다.
가슴아프게도, 블레셋을 심판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환란가운데로 몰아 넣은 하나님의 법궤는
동일하게 이스라엘도 심판하시고 많은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그로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실로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이라는 다른 지방으로 옮겨져 다윗왕이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그 날까지 그곳에 지켜지게 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책망하고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다시 세우는 것에도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분께
전심으로 돌아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법궤가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하면서
착각하였을 것입니다. “아 내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나님이 당연히
내 편이시지. 블레셋 놈들 꼴보기 좋다.” 하나님은 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더 나아가서 모든 열방이 주님을 알고 주님께 돌아오는 일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들 눈의 티끌을 논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불의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둘다 심판하고 계신 것을 목격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고 조롱할 때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영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예배하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은 책망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조롱하는 세상의 권세들이 무너지고 심판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내 안에 우상들을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는 7장 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며 이웃을 위해 중보하는 교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비극적인 법궤의 귀환과 그에 따른 심판을 경험하고 난 후에, 사무엘의 지도 아래서 미스바를 중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따르기로 결단하고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였을 때,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힘이 되셔서 블레셋의 거침없는 공격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온전히
보호하시고 그들을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승리는 전장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결정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고
또 삶의 전장터로 나아가실 성도 여러분 한분 한분,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온전히
회복하시고, 승리를 확인받고 출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내 어깨에 메워졌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길을 따라서 묵묵하게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걸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데서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그분과의 관계를
먼저 온전히 회복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고 가정 속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