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14, 2013

[설교] 법궤를 지고간 암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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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일 새벽기도 설교

본문: 삼상 6:1-19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청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치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삼아 전쟁에 임했던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 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어제 묵상하셨던 5장과 또 오늘 저희가 함께 보고 있는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 떨어진 자신의 영광을 어떻게 스스로 다시 회복하시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략]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달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전 장에 일어난 일들을 잘 생각해 보시면, 법궤가 그 수여 달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 아스돗이라는 곳에서 우상 신 다곤의 신전에 보관되었었지요. 신전 안에 법궤가 보관 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이 다곤의 집 안에 포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신전의 주인인 다곤의 신상은 얼굴과 손목이 끊어진채 엎드러지고, 지방내에 독한 종기가 창궐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방 관리들이 아무래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니까, 법궤를 다른 지방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런식으로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7달 동안 블레셋의 도시들을 옮겨 다니면서, 법궤가 가는 곳마다 블레셋 사람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더이상 블레셋 안에서 법궤를 옮겨다니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 방백들은 법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을 다시 돌려보내는 일은 국제 관계에서 매우 드문일입니다. 항복을 하거나, 자국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 도움을 구할 때라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할 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그냥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속건제물을 붙여서 그것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속건제물은 guilty offering, 다시 말해서, 죄를 진 사람이 죄에 대해 자복하고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물을 드린 다는 것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뿐 만이 아니라, 이전 5장에서는 계속해서 블레셋 지도자들은 법궤를 지칭하는 말로, “이스라엘 신의 궤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요. 오늘 6장에서 그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는,  여호와의 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그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신 중의 하나로 무명신으로 여겼던 그들이 이제는 확실하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그것을 여호와의 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5절말씀에, 블레셋 방백들에게 자문하고 있는 제사장과 복술자들이 제안합니다: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속건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 나온 니느웨 백성들처럼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블레셋은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블레셋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제사장 엘리의 가문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블레셋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 낮추는 모습은 엘리 가문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모습을 더욱 드러나게 합니다.

7-8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법궤를 옮기기 위해 새끼를 낳은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소 두마리를 수레에 메워 돌려보내라고 제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번째로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소들은 수레를 잘 끌고 갈리가 없습니다. 수레를 운반하는 일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운송의 역할을 하기 어려운 소들이라는 것이죠. 두번 째로 갓 새끼를 낳은 소들이라는 것입니다. 갓 새끼를 낳아서 젖이 나는 소라고 10절에 기록하고 있는데요. 젖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장거리를 움직이기에 몸이 불편한 소들입니다. 더구나 새끼 송아지들을 집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어미 소들이 새끼들에게로 가고자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당연하고 강한 모성본능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방향쪽 보다는 집 쪽으로 갈 확률이 더 높은 소들이라는 것입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이 원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움직일 가능성이 적은 소 둘을 메워서 그 수레가 그래도 이스라엘 쪽으로 향하면, 우리에게 내린 진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인줄 확실히 알겠다라는 일종의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앞에 두고서 제단에 물을 부은 후에, 제단에 불을 내려서 타오르게 하시는 이가 진정한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모두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의 지혜와 꾀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블레셋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두 암소가 이스라엘의 경계 지역인 벧세메스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울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 대로를 따라 곧장 벧세메스의 골짜기까지 법궤가 든 수레를 끌고 갔습니다.

법궤의 여정을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욕심에 의해서 또 불경건한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에 의해서 성소 바깥으로 나온 법궤는 블레셋 군사들에 의해서 또 지역 군수들을 통해서 이곳 저곳을 전전하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장면에서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데, 말도 못하고 일도 못하는 암소 둘에 의해서 그 법궤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12절에 암소가 대로를 가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율법을 주야로 읽었던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든지 신명기와 여호수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였을 것입니다. 신명기 28 14절에,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우로 벗어나고 있는데 두 암소는 치우치지 않고 대로를 갔다는 것이에요.

집에서 잘 훈련된 강아지나 다른 동물들을 키우시는 분들은, ‘강아지 새끼가 왠만한 사람보다 낫구나.’라는 생각해보신 적 있을것 같습니다. 종종 뉴스를 보면서 나이드신 분들이 저 누구 누구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씀하시기도 있는데요. 오늘 말씀 속에 암소 둘이 바로 그런 풍자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법궤를 맨 암소 둘은 한번 멘 적도 없는 수레를 묵묵하게 끌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자신 앞에 놓여진 대로를 묵묵히 걸어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진짜 소만도 못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 두 암소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놓여주신 길을 묵묵하게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 두 암소는 갈바를 알지 못하고도 그 놓여진 길을 소치는 사람의 인도 없이도 치우치지 않고 묵묵하게 걸어갔습니다.

14절에 보니까, 그렇게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언약궤가 처음 실로의 성소로부터 나올 때부터 주욱 있어왔던 문제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잘못을 범하였었는데요. 오늘 법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엄청난 환난을 주고 돌아오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교만한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들 수 있었을 상황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처음 갖고 있던 하나님을 청종하기 보다는 이용하려는 교만해진 마음이 되살아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사용하고자했던 법궤의 목적이었던 블레셋의 심판이 오랜 패배 이후에 이뤄져서 법궤가 블레셋을 심판하고 그들 손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그대로 법궤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손으로 돌아왔다면,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그들의 잘못을 오히려 정당화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을 것입니다.

가슴아프게도, 블레셋을 심판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환란가운데로 몰아 넣은 하나님의 법궤는 동일하게 이스라엘도 심판하시고 많은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그로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실로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이라는 다른 지방으로 옮겨져 다윗왕이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그 날까지 그곳에 지켜지게 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책망하고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다시 세우는 것에도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분께 전심으로 돌아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법궤가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하면서 착각하였을 것입니다. “아 내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나님이 당연히 내 편이시지. 블레셋 놈들 꼴보기 좋다.” 하나님은 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더 나아가서 모든 열방이 주님을 알고 주님께 돌아오는 일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들 눈의 티끌을 논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불의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둘다 심판하고 계신 것을 목격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고 조롱할 때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영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예배하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은 책망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조롱하는 세상의 권세들이 무너지고 심판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내 안에 우상들을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는 7 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며 이웃을 위해 중보하는 교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비극적인 법궤의 귀환과 그에 따른 심판을 경험하고 난 후에, 사무엘의 지도 아래서 미스바를 중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따르기로 결단하고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였을 때,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힘이 되셔서 블레셋의 거침없는 공격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온전히 보호하시고 그들을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승리는 전장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결정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고 또 삶의 전장터로 나아가실 성도 여러분 한분 한분,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온전히 회복하시고, 승리를 확인받고 출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내 어깨에 메워졌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길을 따라서 묵묵하게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걸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데서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그분과의 관계를 먼저 온전히 회복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고 가정 속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Monday, March 4, 2013

[설교] 승리의 삶: 하나님을 경외하기


3 4일 새벽기도 설교
본문: 삼상 4:1-16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승리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운데서도 승리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요. 교우들과 함께 인사하거나 이메일을 쓰실 때, 한주 승리하세요라는 말씀 자주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찬송가도, 주제 별로 분류가 되어있는데, 목차에 보시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분류된 주제어 중에 4번째로 등장하는 찬송가 분류제목이 바로 분투와 승리라는 주제어입니다. 찬송가 열 다섯장이 이 소제목으로 분류되어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승리라는 것은 개인 적인 차원에서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든 반드시 취해야할 지향점인 듯 싶습니다. 오늘도 이 새벽에 어둠을 깨치고 이 자리에 나오신 우리 한분 한분 다 마음 속에 오늘 하루 가운데 나와 내 가족이 승리하는 삶 살기 원한다라는 간구하는 심정을 가지고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승리할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그런 승리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볼 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같이 읽으신 것처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패배에관한, 매우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잠깐 본문에 나타난 사건 이전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요.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 시대 동안 계속해서 죄와 그로인한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을 반복하면서 살다가, 사사기 마지막에 가서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혼돈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상태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바로 전 장인 3 1절에 보시면,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포하고 백성을 위해 중보해야할 제사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임재가 희귀하여진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 희귀하여졌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갑자기 바꾸어 버려서 그런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욕심을 쫓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도 들을 수가 없는 강퍅함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라고 오늘 본문 4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한 은 이전 장에서 나온 바 대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섬긴, 엘리 제사장 가문을 무너뜨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의 입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회개도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직접 사무엘에게 들은 제사장 엘리 조차도 이는 여호와이시니 [그가] 선하신대로 하실 것이니라.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요나서를 접하신 분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짧고 간단한 메세지 앞에서도 옷을 찢고 회개하였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지요? 그것은 회개와 돌이킴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에서 회개가 아니라 전쟁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옷을 찢고 주님앞에 회개하며 돌이켜야할 순간에, 블레셋과 싸우러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회개와 돌이킴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한 시점에서 세상을 도전하러 나가는 전쟁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다른 블레셋과의 전쟁 장면과는 다르게,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나가서 블레셋사람과 싸우려고 먼저 진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투하려고 진을 친 곳의 이름이 흥미롭게도 에벤에셀입니다. 도움의 반석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1]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고백은 전혀 잘못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지요. 하지만, 오늘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은 그 신앙고백을 자신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고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시기 때문에 내가 잘못할 때에도 내가 원하는 것 다 해주시고 내가 지금 이 상황을 돌파하려고 하는데 무조건 도와주셔서 이루게 해주실 것이다. 한 두 번은 그렇게 어리석은 믿음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저를 북돋아 주신 경험을 한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되겠죠.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경외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청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승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무조건 다 해주실 것이고 하나님 능력이 곧 내가 언제든지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도구로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바로 그 같은 생각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그것은, 첫번째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천명 가량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장로들이, 전장에서 물러나지 않고 두 번째 전투를 시작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나오도록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지금 이스라엘은 실로로 돌아와 하나님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이 돌이키기는 커녕, 하나님을, 그 법궤를 끄집어 내와서, 하나님이 시키시지 않은 전쟁, 패배한 전쟁을 돌이키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그래서 이 쯤에서 미리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도 패배하겠구나…’ 왜 하나님의 법궤가 앞서 나간 전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패배한 것입니까? 법궤가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문제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전장에 나갔는데 패배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망신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먹칠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장로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 계획을 실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영광이 걸린 일이니까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믿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대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전쟁이 패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세상에 널리 전파되기를 원하시지만, 그의 백성이 올바른 길로부터 떨어져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자신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도록 이끄시는 데에 초점을 맞추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법궤를 가지고 나아오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저희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법궤를 가지고 나오기로 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말씀에 의거한 선택이 아니라 대중이 환호할 만한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선택, right choice가 아니라 인기있는 선택, popular choice였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살면서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도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인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도 법궤를 처음 가지고 나왔을 때는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같은 분위기였습니다. 5절 부터의 말씀에 보시면,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니까 온 이스라엘 군사들이 얼마나 큰소리로 환호하면서 사기충천하였는지, 땅이 울렸다고 합니다. 그 큰 환호 소리를 듣고 블레셋 군사들이 두려움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기를, 신이 히브리 진영에 이르렀다.라고 말하면서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일이 없었도다.하면서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선택을 했는데 그것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믿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오늘 본문 가운데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신 것을 볼 때, 우리가 늘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두번째로 언약궤를 가지고 나오기로 결정한 이스라엘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법궤를 지고 나오는 사람이 누구였는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대표하여 그 법궤를 지고 나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오늘 첫절에서 사무엘의 경고의 말씀의 표적이 되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두 인물이 그 법궤를 가지고 나온 책임자라는 것입니다. 이 쯤되면 우리 독자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스라엘의 패배는 이미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잘 될 지 안될 지, 어떻게 알 수 있는냐? 그것은 그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인가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들이 옳은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행 되는 모든 일들이 다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두려운 사실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였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정형화된 신앙의 틀을 믿고 나아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늘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든 하나님의 형상과 믿음의 틀에 의존해서 나의 욕심대로 살고 있는가? 제 자신에 물어보면서, 내가 오늘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그 분의 말씀 앞에 무릎 꿇는 하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패배는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좋은 소식을 듣고자 말씀을 편 제 심장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요즈음 세상에서 많은 조롱과 지탄을 받고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말씀인 것같기도해서 마음이 괴롭고 소화하기 힘든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스토리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고 이스라엘이 망했다면, 얼마나 우리 마음이 어렵겠어요? 그런데 아직 4장까지밖에 저희가 묵상하지 않았지만, 끝이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왜 그렇죠? 사무엘상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한나라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어린 사무엘을 준비시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의 정말 어둡고 혼돈의 시기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을 시점에, 하나님은 이미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무엘서를 기록한 저자는 1,2,3장에서 사무엘의 이야기를 한 이후에 4,5,6장에 이스라엘의 상태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사무엘을 등장시키지 않았습니다. 7장이 시작하기까지 사무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두운 흑암기 뒤에서 사무엘은 그렇게 가리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듯이, 인류의 가장 어두운 시간 중에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지고 어두워진 세상 가운데서도 연약하지만 오히려 그 어둠 때문에 더욱 빛날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으시고, 기르시고, 준비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 다시 시작되는 한 주를 의탁하러 나아오신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빛나는 하나님의 조명이 비춰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승리하는 삶을 사셔야 될텐데,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청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하나님 주시는 말씀 무엇입니까 주님? 오늘 나에게 하나님 바라시는 것 무엇입니까? 기도가운데 물으시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시면서 시작하시는 오늘 하루 속에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1] 실제 이 지명은 이 사건이 지난 후에 지어진 것으로, 7장에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사들을 어지럽히고 대패하게 하신 곳에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그 곳에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이름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