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anuary 30, 2013

[설교] 주님을 찾는 사람



본문: 막 5:21-43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구절이 있지요?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문이 열리리라. 하나님 나라와 신앙생활하면서 기억해야할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는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이 은혜를 경험하고 역사를 일으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속한 마가복음 5장에는 먼저 예수님을 멀리하고 피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나서 예수님은 그 지방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떠나라는 그들의 부탁을 듣고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향하셨던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반면에 배를 타고 도착한 강 반대편에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군중들이 먼저 알고 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끔 텔레비젼에서 보면, 인기 가수나 연예인이 차에서 내리면, 언제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모르게 팬무리들이 몰려들어서 아수라장이 되는 것을 자주 보잖아요? 이유와 동기는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한 광경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은 저마다의 필요와 이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보고자 자신들의 활동이나 일들을 포기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육신적인 고통이나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왔을 것입니다. 의사가 고칠수 없었던 다른 로마 제국의 전문가들이 해결 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가지고 나온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돈이나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온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만난, 예수님의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간절한 마음 뿐만이 아니라 필사적인 노력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자 된 친구를 위해 지붕을 뚫어서 병자를 줄에 메어 내려보낸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친구들은 군중 속에 앉아서 기다려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하는 만큼, 안전한 방법으로, 나의 편안한 곳에 머물러서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군중 속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수준 이상으로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많은 군중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했던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복되고 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기록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 자리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안에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도전하며 나아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 12절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자가 빼앗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도전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사그러들지 않고 주님을 향해 멈추지 않고 도전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치유받고 고침받고 예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믿고 적당히 기도하는 것에 만족하는 지 모릅니다. 튀면서 신앙생활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구절 바로 다음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1:17).
찬양 인도자나 예배인도자들이 골방에 들어가서 간구하면서 준비하고 앞에서 간절하게 찬양을 인도해도 입도 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찬양이 나오기 전까지는 마음을 열기를 거절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어떤 예배인도에 관련된 책에서는 그것을 시동이 걸리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요.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예배처소에 들어오기 전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열정이 가득차서 들어와서 찬양이 시작되기도 전 부터 하나님과의 교통이 시작되어야하는데, 기대도 없이 열정도 없이 나와서, 오늘 네가 내 마음을 움직이나 안움직이나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예배드린 적 다들 있으실겁니다.
아직도 서너시간을 걸어서 예배를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많이 있다는 것 기억하시지요? 우리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회개해야합니다.
제가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라는 단체가 한국에서는 찬양예배를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여름에는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수련회를 열기 때문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아직고 그 때 예배를 잊지 못하는 것은, 찬양인도자들이나 설교자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열정이 정말 예배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때만해도 한국에는 수련회를 좋은 숙소에서 편하게 하고 그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자매 분들은 방에서 잘 수 있지만, 형제들은 본당에서 침낭 깔고 자는 그런 수련회가 대부분이었죠. 아침 예배가 6시 시작인데, 아주 무서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새벽 4시부터 자매들이 머리도 묶지 않고 예배실 문앞에 서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제가 도전 받은 모습은, 보통 예배 시작 전에 준비 시간동안 찬양 반주나 테잎을 틀어주잖아요? 사람들이 기다릴 수 없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반주테잎만 나와도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하기 시작합니다. 찬양팀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예배장이 찬양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리 인도자가 망치고 죽을 써도 하나님의 역사가 안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예배분위기나 다른 환경을 핑계삼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린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군중 속에 머물면서 무엇을 했는 가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영혼의 시동을 걸 수 있는 키를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나입니다. 찬양인도자나 설교자가 시동을 걸어준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누가 시동을 안걸어주면 난 간절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마음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기대와 열정을 가지고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역시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의 구조상으로 오늘 본문은 굉장히 특이한, 잘 계산된 세련된 서사 구조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전에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들어보셨던 문학구조 중에 액자 구성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당시 유대교에서 모임 장소인 회당을 관리하고 모임을 주관하는 당회장같은 사람입니다. 사회적인 종교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딸이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부모 된 사람에게 있어서 자식이 아프다는 것은 굉장히 가슴아픈 일입니다. 장애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심정을 많이 느껴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자식이 나보다 먼저 죽게 되었다는 것, 더구나 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 상태를 바꿀 수 없게 되었 을 때, 부모의 마음은 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도 그 무엇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런 야이로에게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식이 들려지게 됩니다. 유대교 지도자로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자신에게는 사회적으로 안좋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바리새인과 성전 지도자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그가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는 진영에 있는 회당장의 간곡한 부탁들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그의 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이야기가 25절에 다른 한 여인의 등장으로 중간에 멈춰버리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써내려가는 화자가 회당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냐하면, 그 여인이 예수님의 가는 길에 큰 도전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혈루증이 있다는 것은 의식상으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몸에 피가 흐른 다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유대 공동체에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을 피해야 하는 불결한 상태 거룩하지 않은 상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 불결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들에게 닿기만 하여도 이스라엘 제사법에서는 그에 맞는 제사를 드려서 정결함을 회복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여인이 예수님께 그 몸에 손을 대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아마 혈루병을 치료해달라고 말을 꺼내는 즉시,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의 병에 대해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7절에 보니까 무리에 끼어서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으니까 직접 부탁할 수 없으니까 그 옷에 손을 대서라도 예수님의 치유를 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비슷한 혈루병이나 다른 나병환자들이 유대 땅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고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치유받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을 치유하러 가시는 예수님을 쫓아만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다른 사람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간절함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자신이 혈루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거룩한 예수님을 군중속에 끼어들어서 만지고자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멈추지 않고 주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자신의 딸에게 손을 얹고 치유해달라고 한 것도 큰 결심이요 대단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 얹으심으로 병고침을 받은 것을 알고 결정한 것이 어떻게 보면, 예상가능한 범위에서의 믿음이었다면, 이 여인은 가진 것 없고 회당장만한 사회적인 힘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믿음으로 회당장을 능가하여 예수님의 치유를 먼저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향한 두가지 다른 태도를 가진 두가지 세계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가까이 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속한 세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속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세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한 믿음의 경쟁이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경쟁은 서로를 향한 경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높아지기 위한 경쟁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이 믿음의 행동의 결과를 보기도 전에 또다른 여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앞에 그 믿음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 이사람 믿음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더 큰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올스타전 같은 축제가 교회 안에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믿음은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런 거룩한 도전받는 경험들이 우리 삶 속에서 관계 안에서 너무나 드물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경기도가 비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학교가 시험을 봐서 지원해야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비슷한 수준의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한 반에 50명학생들의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게 됩니다. 내가 한 문제만 실수해도 등수가 5-6등이 밀려나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기간이 되면, 피튀기는 경쟁이 시간됩니다. 10분 쉬는 시간에도 일어나지 않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침 7 30분부터 저녁 11시까지 그렇게 학교에 있다가 밤에는 독서실로 가는 학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영혼을 죽이는 교육제도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때의 열정들은 동창들 사이에 늘 추억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옆에 집사님과 경쟁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만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지를 도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년 전만해도 한국 교회 자랑이 한국교회만한 열정있는 신앙을 가진교회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를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파송하고, 배울게 많은 나라라서 미국의 선교 횃불을 하나님께서 한국으로 옮기셨다는 말도 많이 했습니다. 요즘에는 중국이나 동남아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에서 우리나라로 하나님께서 그 등불을 옮기셨다고 말입니다. 자신들의 열정이나 믿음의 도전하는 정신에 비해서 한국사람들 이제 별로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다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 올 수록, 이런 믿음의 역전들은 계속 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작고 연약한 사람들이 강한 사람들을 대신하는 현상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계속 일어납니다. 그런 세계를 살면서, 내가 지금 있는 곳에, 군중 가운데, 내가 편안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내 신앙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사자성어 중에 학여역수 (學如逆水)”라는 말이 있지요? 배우는 것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는 것일까요?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노 젓는 것을 멈추면 안됩니다. 내가 지금 젓는 만큼만 젓고 있어도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것보다 더 큰 열정을 가지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 게 배움이라는 뜻입니다. 믿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한국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했으니까, 이젠 열심히 말씀보고 예배 나가지 않아도 현상유지는 될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현상 유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멈추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열정이 식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 멈추면 내일은 저 뒤에 떨어져 있게 되는게 신앙의 법칙입니다. 무슨 일을 많이 하시고 봉사를 하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외친 것처럼, 오라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 6:4)!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 대한 열정을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제 예수님이 여인을 고치시고 온전한 회복을 확인시켜주고 계신 중에 그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사람들이 달려와서 야이로에게 고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여인 하나가 와서 예수님을 가로채더니 그 허비한 찰나의 시간에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셨다면 살 수도 있었겠다는 분한 마음이 그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을 절망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관심을 거두지 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하라.
세상의 경쟁 구조에서는 이긴 사람은 취하고 진 사람은 잃는 것이 정의 입니다. 기회를 잡은 사람은 살고, 기회를 놓친 사람은 죽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세계에서 그런 경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에게나 강한 자에게나 다 공평하게 그 필요를 돌아보실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회당장은 자신이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소식을 전하러 온 회당장의 사람들 조차도 이제 예수님을 더이상 귀찮게 하지말고 떠나자고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은 믿음이던 많은 믿음이던, 그 믿음 대로 구한 모든 것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회당장에게 약속하신 그 치유의 여정을 중단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회당장의 집까지 묵묵하게 아무 설명 않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함께 걸어가시면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주변을 물리시고, 세 제자외에는 따라옴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회당장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 걷는 가운데 회당장은 그 마음의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영적인 패배의식 속에서,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믿음을 갖고 행동했더라면..이라는 죄책감으로 부터, 자신의 과거와 누려왔던 많은 삶에 대해 다시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걸으시면서 회당장의 마음을 치유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죽은 아이가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죽은 아이에게만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저 군중 속에 머물러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 그 이상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영적인 무관심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 헛된 자존심 속에 머물러있는 믿음의 죽음으로 부터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예수님을 멀뚱 멀뚱 쳐다만 보고있었다고 상상해보세요. 다들 서로 눈치만 보고 있고 예수님께 감히 나서서 나를 고쳐주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분명히 나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치유받아야 될 문제가 있는데, 오랜 습관 속에서 굳어진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 누가 나서사 먼저 하면 지켜보고 따라가는 관중으로서의 삶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 이제 내게 오라고 하셨는데 다들 멀뚱히 서서 눈치만 보고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세요. 다행히도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성경적인 지식도 부족하고, 재정적으로나 문명적으로 훨씬 뒤떨어진 사람들이었지만, 그 믿음만큼은 수동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진실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따르지만 뒤에서 쳐다만 보는 관중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구하고 나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도전하는 사람입니까?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일대일로 대면하고 서셔서 나의 믿음에 관하여 물어보실 때, 교회 탓하고 환경 탓하고 핑계 댈 수 있을까요? 나의 예배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민을 오고 유학을 와서 여건이 안되서라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시동은 내가 걸어야하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로 믿음생활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예배와 신앙이 전적으로 나와 하나님과 사이의 문제에서 해결될 문제이지 상황의 탓으로 돌린다고 하나님께 설명될 이유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그 마음의 간절함과 가난함이 있는지. 하나님을 향해 도전해야할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인지 돌아보아야할 것입니다. 죽은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우리의 믿음이 살려면, 우리가 머물고 있는 그곳에서 일어나야 됩니다. 일어나서 그 간절함을 회복하고 표현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따라하는 것은 간절함이 아닙니다. 간절한 사람은 군중이 정해놓은 분위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차가운 곳이든 뜨거운 곳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안느껴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느껴지면 반응하고 안느껴지면 안반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는 간절한 사람입니까 배부른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 하나님을 추구하는 간절한 마음을 겸손하게 지속하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되기를 오늘 이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